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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이가 왔다。

by 규아

그날, 장지동 골목은 여전히 아이들 목소리로 가득했다. 학교가 끝난 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땅바닥에 돌로 그려놓은 오징어 머리 모양의 금을 따라 뛰어다니는 아이들. 어떤 애는 두 발로, 어떤 애는 깨금발로 뛰다가 넘어졌다. 흙먼지와 땀방울이 뒤섞인 그들의 움직임은 진흙탕 속 생쥐 떼 같았다.


“소독차다.” 누군가의 외침에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곧, 뿌연 연기를 내뿜는 흰 트럭이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며 그 뒤를 쫓았다. 연기를 향해 뛰어드는 그 무리의 얼굴엔 흥분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바짝 붙으면, 정말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아이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새끼들, 시끄러워 죽겠네!” 어른의 꾸중이 날아들자 잠시 소리가 잦아들다가 곧 다시 들썩였다. 이런 모습을 새초롬하게 바라보던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심하다는 듯이 무리를 쏘아보다가 동생이 끼어있는 걸 보자 소리쳤다. “야, 너 이리 안 나와? 옷이 그게 뭐야. 거지같이!” 연기 속에서 민망하게 빠져나오는 남자아이. 함께 뛰어다니던 키 큰 여자아이가 그 모습을 입을 삐죽 대며 지켜보다가 무리를 뒤쫓는다.


아이들의 소란이 연기를 따라 멀어지자, 연립 앞에 놓인 골목은 잠시 고요해졌다. 뉘엿뉘엿 해가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동안, 문틈 사이로 부침개 부치는 냄새가 번졌다. 바알간 노을빛을 뒤로하고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향했고, 집집마다 저녁상을 차리는 엄마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골목을 소란스럽게 했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금세 “배고파”라는 투정으로 바뀌었다.


“지이이익.” 낡은 바퀴가 골목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이삿짐 트럭 한 대가 연립 앞에 멈췄다. 연립에 일자로 도열한 둥지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들이 문틈 사이로, 창문 너머로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아빠를 따라 나온 아이들로 다시 소란스러워진 골목. 트럭에서 내려지는 짐들에 시선이 쏠렸다. 전축, 식탁, 코끼리밥솥…. 꽤 살림이 있는 집 같았다. 새로운 또래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장난감이 있나 관심을 보였지만 실망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학생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잠시 기대의 눈빛들이 마주치는 순간, 짐 사이 쌓여있던 동화책 뭉치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 이게 뭐야!” 트럭 뒤편에서 여자아이의 작은 외침이 들렸다. 수많은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 아이는 엄마인 듯한 아줌마 뒤로 얼른 숨어버렸다. 손에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한 ‘마론 인형’이 들려 있었다. 참빗으로 빗어 올린 듯한 단정한 머리가 무거운 듯, 파리한 얼굴의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사해.”라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조심스레 가느다란 허리를 숙였다. 연립의 맨 끝집 문이 열리고, 그 조그마한 아이는 떨어진 책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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