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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이 사는 집, 장지동 연립

by 규아

며칠 뒤,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오래된 길을 걸었다. 군산의 도심지는 몰라보게 바뀌었지만, 이십여 년 전 그 길만은 남아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와 짭조름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동네만은 오래전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엄마가 살던 집이 있었어.” 그녀가 말하자 아이들은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 길은 마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낡은 담장과 철제 대문, 바랜 간판이 햇살에 회색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익숙한 동네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사거리의 약국은 건강원으로 바뀌었고, 콩나물과 두부 심부름을 하던 가게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미문초등학교 옆 문구점은 현수막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고, 쿰쿰한 냄새가 새어 나오던 막걸리집은 문이 닫힌 채, 낡은 간판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학교 담장을 따라 걷다 보니 ‘말랭이 마을’이라 불리던 곳이 나왔다. ‘엄마가 말랭이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랬는데.’ 그곳은 이제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등성이에 따닥따닥 매달려있던 집들은 사라졌지만, 말랭이 너머 숲을 흔들어대는 바람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말랭이는 ‘산비탈’을 뜻하는 사투리였다. 전쟁 통에 피란민들이 둥지를 틀고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들이 모여 생겨난 마을. 그들이 떠난 자리에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이 날아들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곳의 바람에는 그때의 삶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바로 맞은편, 2층 양옥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없어졌겠지.’ 이미 마음속으로 한 번 떠나보낸 곳이었다. 하지만 골목 끝에서 시선이 멈춘 순간…. 그 연립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장지동 연립. 이름도 없어 행정동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담벼락에 ‘국민주택’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그 집은 여전히 디귿(ㄷ) 자 모양 그대로였다. 햇살이 연립마당 안쪽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빨랫줄에는 누군가의 수건과 옷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녀는 너울대는 빨래에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햇빛의 향을 떠올렸다. 옥상에서 갓 거둔 빨래에서 나던 뽀득뽀득하고 그을음 같은 내음.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의 발걸음도 멎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소리가 났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서서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를 품어온 집. 바람은 창문 틈을 드나들며 속삭였고, 햇살은 벽을 쓰다듬듯 흘러내렸다.


“여기가 엄마 살던 집이야?” 호기심 가득한 큰딸이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아꼈다. 고요한 이곳에서 한마디만 내어도 누군가 문을 열고 “민정아!” 하고 부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들킬까 봐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기억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밥 짓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 그리고 어린 날의 햇살. 살랑,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의 '민정이', 그 연립에 사는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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