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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단내

by 규아

말랭이에서 도망치듯 내려왔던 그날 저녁, 민정이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집 안에서는 엄마의 고함, 외삼촌의 나무람, 외할머니의 흐느낌이 뒤엉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불 안으로 파고드는 건 외할머니의 전대에서 늘 배어 나오던 달짝지근한 단내였다. 기름 냄새가 밴 전대, 오래 묵은 설탕 조각들이 문질러진 동전들, 바싹 마른 손등에 남은 따스한 온기…. 민정이는 그 단내 속에서 겨우 눈을 감았다. 그 향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감싸던 외할머니의 온기였다는 걸, 아직은 알지 못한 채로.


외할머니는 작은 체구로 일곱 남매를 키워낸 여인이었다. 다섯 자도 채 되지 않는 몸으로 가진 것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채, 군산의 억센 바닷바람을 매일 새벽 정면으로 맞으며 버틴 세월은 어떤 장수의 갑옷보다 더 단단했다.


군산 째보선창 너머로 보이는 장항에서 배를 타고 시집온 후, 외할아버지의 실패로 땅이 하나둘 팔려나가고, 마침내 남은 건 일곱 남매뿐이던 시절. 수줍고 가냘픈 과부는 헐값에 산 리어카를 끌고 새벽마다 도매상 앞에 줄을 섰다. 도나스 노점상……. 가진 것, 세상 경험 하나 없이 남에게 구걸 안 하고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때 부잣집 마님이었던 외할머니는 나만 죽이고 살면 새끼들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십 년, 회색빛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칼바람 속에서 몸을 말아 쥐며 리어카를 끌었다.


어린 민정이에게 외할머니는 그저 기분 좋은 단내를 풍기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 같은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전대는 신천지였다. 쫀득한 도나스 조각, 비닐에 싸인 메추리알, 달고 고소한 냄새가 스며든 동전들이 가득한 꾀죄죄한 전대는 작은 아이의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였다.


장사를 마친 외할머니는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민정이에게 동전 계산을 맡겼다. 백 원, 오십 원, 십 원을 골라 열 개씩 탑을 쌓는 놀이. 작은 손으로 동전 탑을 쌓고 개수를 세어 돈의 액수를 계산해 말하면, 외할머니는 언제나 눈을 가늘게 뜨며 함박 웃었다. “우리 민정이는 참 신통하네.” 그 말은 세상 어떤 칭찬보다 따뜻한 온기를 품었고, 민정이의 속을 야무지게 채워주었다.


그러나 그 ‘단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바뀌었다. 민정이가 학교에 가고 세상의 시선과 기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전대의 달콤함은 어느 순간 ‘수치심’으로 변했다. 기름기 눌어붙은 털모자, 비에 젖은 몸빼바지, 삐걱거리는 리어카. 어릴 때 사랑스러웠던 것들이 세상의 눈으로 보니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 역시 “가족들 창피하니 이제 그만하라”며 외할머니를 말렸다. 그런 흐름 속에서 민정이의 말랭이 사건이 겹쳤고, 결국 몇 달 뒤 외숙모는 외할머니의 리어카를 고물상에 넘겨버렸다. 그 뒤로 외할머니는 몸져누웠다. 교통사고를 당해 늑골이 다 으스러져도 며칠 후 일어나 새벽길 도나스를 떼러 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 평생을 버티게 하던 기둥이 뿌리째 뽑혀버린 듯했다.


민정이는 그 이후로 오래, 아주 오래 후회했다. 조금만 더 마음이 강했다면, 전대의 단내를 외면하지 않았으리라고, 부끄러움을 두려워해 고개 숙였던 그 순간이 어쩌면 외할머니의 마음을 처음으로 무너뜨린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람이 자기 안의 부끄러움을 지우려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함께 희미해진다. 숨기고 싶은 모습까지 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나’를 세울 수 있다. 외할머니의 단내는 민정에게 그런 진실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우치게 했다.


그 냄새는 어떤 날은 따스하게, 어떤 날은 아릿하게 민정이의 마음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울렸다. 그 향은 부끄러움이기 전에, 민정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않게 하는 가장 깊고 오래된 ‘뿌리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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