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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 이후, 두 번째 균열

by 규아

이사 오기 전의 집만큼은 아니었지만, 민정이의 집은 여전히 손님들로 붐볐다. “민정이는 참 착해.”, “나중에 뭐가 될까?”, “미스코리아 해야지.”, “아니야, 머리 좋으니까 과학자!” 엄마의 지인들이 던지는 말들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들 중엔 ‘양색시’라 불리던 이모도 있었고, 막내 외삼촌의 친구인 ‘백악관파’ 조폭 삼촌들도 있었다. 사회에서는 그들을 밑바닥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민정이에게는 의리와 정직, 겸손을 가장 먼저 가르쳐준 어른들이었다.


과자와 인형과 용돈은 아낌없이 쥐어주면서도, 거짓말이나 남을 깎아내리는 말에는 단호한 사람들이었다. 간혹 소란과 막말이 뒤섞여도, 그 안엔 묘하게 따뜻한 정이 흘렀다. 민정이는 그런 어른들 틈에 조용히 파묻혀 일일공부를 풀거나 책을 읽었다. 때론 책으로 벽을 세우고 층을 나누어 마론 인형 ‘수지’의 집을 만들어주는 데 몰두하기도 했다. 한두 차례 푸닥거리 같은 엄마의 히스테리만 지나가면, 민정이 세계에는 더는 걱정이 없었다. 책과 인형만 있으면 하루가 다 갔다.


엄마는 민정이를 매일같이 혼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했다. “저렇게 사나운 엄마 밑에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왔대?” 누군가 농담처럼 말하면, 엄마는 엷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웃음 속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랑이 섞여 있었다.


‘집’은 민정이의 거의 모든 세계였다. 학교에서 말고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린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가 친구를 사귀라며 과자를 들려보내도, 민정이는 자기 몫을 하나도 먹지 않은 채 모두 나눠주고 돌아왔다. 미움도 모르고, 싸움을 한 적도 없고, 누가 빼앗으면 내어주는 아이였다. 엄마가 매를 들어도 “내가 잘못했지…”만 남는 아이였다.


하지만 말랭이에서 구슬값을 핑계로 협박당하고 오줌 싼 일을 들먹이며 조롱당했던 그 날이 겨우 지나갔을 무렵, 민정이의 세계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나오던 시간. 민정이도 그 소란 속에 섞여 걸었다. 먼저 눈에 띈 건 자신을 잘 따르던 아이였다. 여자아이인데도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채, 며칠은 빨지 않은 듯한 체육복을 늘 입고 다니던 동갑내기. 매일같이 교문 앞에서 “민정아”하고 반기며 기다렸고 쉬는 시간마다 문구점에서 불량식품을 사다 건네던 아이였다. 민정이는 그저 고마워서 웃어줄 뿐이었다. 그 호의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누군가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어느 날 당번인 민정이는 수도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손이 닿으면 금세 시려왔지만 묵묵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또 다가왔다. “춥지? 이거 먹어.” 그러면서 오징어 다리 한 줄을 민정이 입에 쏙 물려주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같은 당번 아이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야… 쟤 알아? 쟤네 집 되게 가난해. 저런 거 너한테 사줄 형편도 아니야.” 민정이는 걸레만 비볐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쟤 아빠한테 맨날 맞고 산대. 저런 애랑 놀지 마. 그것도 훔친 거 아니야?”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 말도. 그 침묵이 무엇으로 읽혔는지 모르는 채.


그날 이후 아이는 간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며칠 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독기 어린 눈빛이 번쩍 스쳤다. 민정이는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길, 아이들과 헤어지는 교차로 바로 옆 골목길. “시발。” 욕설과 함께 주먹과 발길이 쏟아졌다. 머리, 뺨, 배, 어디를 맞았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고 거칠었다。민정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분노로 가득 찬 손과 발을 견뎠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면 아이는 바람처럼 도망쳤다.


다음 날,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날도. 폭력은 더 거세졌고, 민정이는 여전히 이유를 몰랐다. 맞을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만 흘러나왔다。누군가에게 이르거나 반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말랭이에서 협박당하던 날들처럼. 넘어져 피가 나도 혼날까 봐 숨기던 날들처럼. 민정이에게 세상은 언제나 ‘내 탓’으로 좁혀졌다.


민정이는 또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예상처럼, 골목 모퉁이에서 그 아이가 튀어나왔다. 무자비한 폭력은 여지없이 반복됐다. 민정이는 여느 때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맞기만 했다.


그때였다. “야!!!”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고함이 골목을 울렸다. 연립 쪽에서 키 큰 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의 주먹이 멈췄다. “너 죽고 싶어? 애를 왜 패고 지랄이야?” 언니의 욕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골목 한가운데를 갈랐다. 그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민정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언니의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다가왔다. ‘저 언니도 말랭이 애들처럼 도와줬다고 돈을 달라고 할까…?’


그러나 언니는 민정이를 내려다보며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야, 너 왜 가만 있어! 누가 때리면 똑같이 때려. 욕하면 같이 욕하고. 가만있으면, 계속 당하는 거야.” 참으라고만 했던 엄마와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 언니의 말은 민정이의 마음 어딘가, 한번도 움직여본 적 없는 작은 근육을 처음으로 흔들어 놓았다. 견디기만 하던 아이의 세계에 분명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금은, 민정이가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숨을 뻗어내는 아주 작은 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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