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연립사람들
민정이네에 세를 든 문간방은 늘 사람의 기척으로 소란스러웠다. 막노동 일터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오는 아저씨와 공장의 소음 속에 하루를 보낸 아주머니, 그리고 다섯 딸의 웃음소리가 좁은 문틈을 비집고 골목까지 흘러나왔다.
민정이는 자기 집의 넓고 정결한 거실을 두고 자꾸만 그 비좁은 문간방으로 스며들었다. 선화 언니네 집처럼 그곳에서도 가끔 양은 밥상머리에 숟가락을 얹어 오뎅 볶음과 시어빠진 김치를 얻어먹곤 했지만, 민정이가 진짜 부러워한 건 밥상 그 너머에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부모님이 모두 일터로 가고 언니들도 학교에 가서 없는 텅 빈 방, 동갑내기 혜정이가 민정이를 구석으로 이끌었다. 혜정이는 보물상자라도 열듯 낡은 목제 반짇고리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알록달록한 실타래와 바늘 쌈지 사이, 그 깊숙한 곳에 작은 비닐봉지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울 엄마가 공장 가기 전에 여기 숨겨놓고 갔어. 나 학교 다녀와서 먹으라고.”
혜정이가 꺼내 보인 것은 노란 계란과자였다. 침이 닿자마자 파스스 녹아내리는 싸구려 과자였지만, 민정이의 눈에는 그 알맹이들이 꼭 노란 보석처럼 보였다. 민정이는 그 반짇고리 속 계란과자를 보는 보자, 처음으로 엄마의 ‘부재’ 속에 남겨진 애틋한 사랑을 느꼈다.
공장의 거친 기계 소리를 견디면서도 딸의 하굣길을 떠올리며 슬쩍 과자 봉지를 밀어 넣었을 아주머니의 손길. 민정이는 혜정이가 내민 과자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굴렸다. 그것은 민정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종류의 온기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난이라 불렀지만, 어린 민정이의 눈에 그것은 따스함이었다.
그 온기에 대한 갈증은 문간방 식구들이 연립을 떠나 20분도 더 걸어야 하는 먼 동네로 이사를 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민정이는 매번 그 먼 길을 달려가 다섯 자매와 어울렸다. "마루치, 아라치" 노래에 맞춰 고무줄을 넘고 공기놀이를 하던 그 소란스러운 오후들. 민정이의 집에는 혜정이네보다 훨씬 비싸고 화려한 인형이 많았지만, 민정이에게는 혜정의 낡은 인형이 훨씬 더 예뻐 보였고, 엄마가 사다 놓은 비싼 과자보다 그 집의 계란과자가 훨씬 더 달았다.
결국 사달이 났다. 민정이는 혜정이의 낡은 인형을 몰래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내리사랑과 북적이는 온기가 밴 그 인형을 제 방에 놓아두면, 그 다정한 기운에 스며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금세 삼촌에게 들통이 났고, 따끔한 꾸중을 들은 뒤에야 민정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형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러 갔다.
다시 이십 분을 걸어 도착한 혜정이네 집 담벼락. 민정이는 인형을 몰래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낡은 인형 속에 배어있던 사람의 냄새, 비좁은 방 안을 덥히던 그 웃음소리들. 민정이는 한참 크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이 정말로 훔치려 했던 건 보풀이 일어난 낡은 인형 따위가 아니라, 그 집의 가난마저 따뜻하게 덮어주던 ‘행복’ 그 자체였다는 것을.
행복은 결핍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텅 빈 공간을 서로의 체온으로 기꺼이 채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비가 새고 바람이 드는 가난 속에서도 마주 앉은 이의 숨소리가 다정하다면, 그 인생은 이미 충분히 호사롭다는 사실을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정한 가난을 향한 지독한 동경은 훗날 민정이가 장년이 되어 군산의 말랭이 마을 노을 아래 서기까지, 그녀의 생을 이끄는 가장 슬픈 나침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