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2부 연립사람들

by 규아

노을 속에 잠긴 아주머니의 수레가 삶의 정직한 증명이었다면, 장지동을 잠시 스쳐 간 사라의 욕설은 깨진 꿈이 남긴 서글픈 파편이었다.


그 시절 '미국'은 단순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에 찌든 현실을 단숨에 지워줄 기회의 땅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만 가면 누구나 큰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스테이크를 썰고, 아이들은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은하수 같은 미래로 나아갈 줄 알았다.

장지동 연립에도 그 꿈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구암동에서 이사를 왔다고 하여 모두가 ‘구암동 할머니’라 부르던 집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집 안으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다. 젊은 여자와 일곱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 그들이 태평양을 건너온 구암동 할머니의 딸과 손녀라는 소문은 금세 연립 담장을 넘었다.


당시 아이들에게 미국에서 온 이들은 외계인만큼이나 신기한 존재였다. 영어를 하는 사람도, 외국에 다녀온 사람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서울에서 온 사람보다도 더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사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한 번이라도 마주치고 싶어 구암동 할머니 집 문 앞을 서성였다. 유창한 영어 한마디라도 들어보고 싶은 간절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정이와 선화 언니는 연립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뾰로통하게 앉아 있는 사라를 발견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비쩍 마른 몸, 이국적인 옷차림의 사라는 영락없이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아이 같았다. 민정이는 반가움과 설렘을 담아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네가 사라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찬란한 영어도, 다정한 미소도 아니었다. 씰룩이는 입술에서 튀어나온 것은 “씨발.”이라는 욕설이었다. 당황한 민정이와 선화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사라의 악에 받친 소리가 계단 가득 울려 퍼졌다. “꺼져! 개년들아!”


미지의 세계에서 온 천사 같던 아이의 입에서 쏟아진 것은 밑바닥의 욕설이었다. 사라는 날카로운 가시를 돋운 채 독설을 뿜어댔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라의 부모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거창한 돛을 올리고 떠났으나 낯선 땅에서의 실패와 지독한 가난으로 매일 전쟁 같은 싸움을 반복했다. 어린 사라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부모가 서로를 향해 내뱉던 증오의 언어를 생존의 도구로 습득했던 것이다.


사라는 한동안 장지동의 유명한 문제아였다. 매일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고 입에는 욕을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연립 앞 평상에 모여 앉은 아이들이 국자에 담긴 설탕을 연탄불에 녹여 '띠기(달고나)'를 만들고 있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냄새가 골목 가득 진동하자 호기심이 충만해진 사라가 기웃거렸다. 민정이는 조심스레 달고나 조각을 내밀었다.


"너도 먹어볼래?." 사라는 평소처럼 날을 세우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달콤한 유혹 앞에서 그만 침을 꼴깍 삼켰다. 건네받은 달고나를 입에 넣은 순간,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사라의 눈매가 순식간에 순해졌다. 차가운 욕설만 맴돌던 입안에 따스한 달콤함이 퍼지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Good."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라의 입에서 처음으로 욕이 아닌 영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와, 방금 영어 한 거야? 그게 맛있다는 뜻이야?" 아이들이 환호하며 다가서자 사라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달콤한 설탕 결정체는 사라의 견고한 성벽을 허물어뜨렸다. 그날 이후 사라는 비로소 일곱 살다운 웃음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사라 엄마는 한국에서 재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새 출발의 여정에 사라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사라는 다시 미국에 있는 아빠에게로 홀로 보내졌다.

사라는 자신의 비정한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그리도 욕설을 내뱉었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가만있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을까, 아니면 엄마에게조차 온전히 안기지 못한 아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질렀던 처절한 비명이었을까. 장지동의 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홀로 미국으로 간 사라는, 그곳에서 어떤 언어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민정이는 가끔 노을이 질 때면 사라의 그 뾰로통한 얼굴이 궁금해지곤 했다.


인생이란 때로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무대이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련에 날개가 꺾여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유배지가 되기도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화려한 조명 뒤에는, 차마 영어로 다 번역되지 못하는 아이의 슬픈 욕설들이 비 내리듯 쏟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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