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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an 10. 2018

‘말씀쓰기’에 대해 한 말씀

스피치라이터의 사생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인류의 초(超) 베스트셀러이자 기독교 신앙서인 성경의 한 문장이다. 맞다. 모든 것의 시작엔 이 ‘말씀(Speech)’이라는 게 꼭 있다. 직장으로 예를 들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회사를 세우고, 1년을 기념하고, 매출 상승이나 프로젝트의 성공을 축하하고, 다사다난했던 새해를 매년 맞고, 신시장 진출과 도전을 격려할 때 ‘말씀’이 늘 있다. 공식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가볍게 모인 술자리에서도 이 ‘말씀’이라는 게 빠지는 법은 거의 없다.


종교적 메시지를 제외하고, 회사(=직장인들에겐 세상의 절반)에서 만나는 말씀의 정수(精髓)는 단연 신년사(新年辭)다. 기업은 신년사를 통해 저마다 지난해 성과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전망하고, 희망을 기대하고, 그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신년사에서 CEO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하는 문제는, 직장인들에게‘승진하려면 뭘 잘해야 하느냐’라는 현실의 우선순위와 직결된다.  


심지어는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농담이나 아부를 할 때도, 리더가 했던 말을 재치 있게 패러디해야 센스 있는 직장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렇기에 100대 기업 총수와 정부기관장의 신년사는 기자들이 꼭 챙겨보는 좋은 자료다.  


기업의 스피치라이터로서, 새해 첫 말씀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건 (사장이 “야, 이거해!”라고 말해주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무엇을 어려워하고 있으며, 이번 메시지는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말씀을 쓰는 첫 단계는, 치아처럼 가지런하게 쌓인,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먼저 주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각 부처의 업무보고 자료를 겸손한 자세로 탐험하는 거다. 어떤 놈을 앞에 두고 뭘 뒤에 놔야 할지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이게 경험이 많을수록, 그 확률이 높아지는데 나는 그때마다 아직 주저하며 매번 소심해진다.


두 번째 단계는, 나름대로 정돈한 자료들을 문맥에 맞게 배치해보는 거다. 또 이 때는 조금 뻔하더라도, 꼭 들어가야 하는 말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와주셔서 고맙다, 영광이다, 기쁘다, 축하한다) 그런 말은 눈 질끈 감고 그 위치에 놔야 한다. 기업의 스피치라이팅이, 세상에 없던 논문을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나만의 글 솜씨를 뽐내는 신춘문예가 아닌 이상, 이 바닥에도 패턴은 있기 때문이다. 패턴은 통계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은연중 기대하고, 편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글의 중간 중간 일부러 흘려놓아야 한다.


셋째는 팩트(Fact)체크다. 사실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건데, 예를 들어 광복절 경축사에서 뤼순과 하얼빈을 혼동하는 건 심각한 일이다. (지금은 누구 때문인지 알겠다만) 스피치라이터가 이걸 못하면, 자리를 내놔야 한다. 내가 확인한 자료들이 사실인지는 기본이고, 지금 여기에 쓰는 게 적절한지 아닌지를 현업에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걸 소홀하게 하면‘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혼자 하기 어려우면, 믿을 만한 사람들로 하나의 팀을 만들어 살펴보는 게 좋다. 청와대라면 참모진이 될 테고, 기업이라면 기획부서나 비서실이 된다.


넷째는 일단 작성했다면 자신감을 갖고 빨리 보고하는 거다. 미리 써놔야 고칠 수 있다. 그 말을 쓴 건 스피치라이터지만, 그 말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주인의 반응을 살피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입혀 단어 하나까지 다시 매만져야 한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해도 ‘어? 이건 내가 쓴 게 아닌데…’라는 말을 들어선 아무 소용이 없다. 명백하게 맞춤법이 틀린 게 아니라면, 통용되는 비문이나 사투리조차도 그 분만의 문체가 될 수 있다. 최대한 그 분이 말하듯이 몇 번이고 다시 써야 한다.


다섯째는, 수정 또 수정이다. 지금까지 한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한다. 혹시 내가 모르는 최근 자료는 없는지, 더 좋은 표현은 없는지 살펴본다. 말의 주인인 스피커(Speaker)의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살리되, 전달할 핵심 메시지는 더 선명하게 날을 세워야 한다. 그를 그가 아닌 사람으로 보일 수는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되고) 그를 가장 멋진 그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다.


간단히 다섯 단계로 설명했지만, 무지개가 7가지 색깔이 아닌 것처럼, 방법을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가장 좋은 건, 리더의 말을 쓰려면 리더처럼 생각하고 리더처럼 고민해보는 거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스피치라이터가 되려면, 작두를 타든가 독심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적으로는 CEO와 지근거리에 있는 게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스피치라이터는 CEO의 절친이 아니라서, 그럴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멀리 있으면서도 가깝게 말해야 하다보니,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그래서는 다시 써야 한다. 평소에 CEO의 말과 글을 연구하고 수집해 놔야 한다. 사랑에 빠질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담으로 글을 마무리하면, 오늘(18.1.10) 10시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봤다. 듣기(Listen)가 아니라, 보았다(See)고 굳이 표현한 것은, 스피치는 텍스트(Text)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피커의 입을 통해 말해질 때 맥락(Context)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철학을 담아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좋았다.


 


특히 “평범한 삶이 민주주의를 키우고, 평범한 삶이 더 좋아지는 한 해를 만들어보겠습니다.”라는 끝맺음은 내게 깊은 울림을 줬다. 아마도 영화 <1987>을 최근에 본 영향이 조금은 있을 것 같다. 스피치라이터인 나는, ‘한번 이런 글을 써봐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꿈은 이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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