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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un 09. 2022

취임사, 尹과 文의 말과 글

스피치라이터의 세상 읽기

감히 장담컨대, 지구상의 그 어떤 부지런한 대통령도 그 많은 연설을 꾸역꾸역 직접 다 쓰진 못합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간, 취임사-기념사-편지-축사-환영사-추모사-신년사와 같은 글을 쓰느라 임기 5년을 다 보낼 겁니다. 행정부의 수반이자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말과 글은 전문성을 갖춘 ‘스피치라이터’를 비롯한 여러 참모진들과 ‘함께’ 쓰는 게 효율적이고 바람직합니다.     


#1. 이색적 경력의 금융인 출신

윤석열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는 ‘김동조 연설기록비서관’입니다. 그의 프로필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첫째, 청와대 합류 직전까지 ‘정치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이고 둘째, 글쓰기와 얼핏 무관해 보이는 ‘애널리스트, 트레이더, 펀드매니저’로 활동한 금융인 이력입니다.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의 신동호 비서관은 시인(詩人) 출신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조인근 비서관은 후보 시절부터 함께해온 메시지 총괄 담당자였습니다. 영미권 스피치라이터는 기자, 소설가, 방송 제작자, 변호사 등 말과 글을 업으로 삼아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 김 비서관은 금융시장의 인문학 고수로 통했다.

김 비서관의 독특한 이력이 이전 정부와 비교할 때 조금 낯설다고 해서, 그게 스피치라이터의 결격사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은 문학작품이 아니고, 기사나 논문과는 접근 방식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피치라이터의 기본은 적정 수준 이상의 안정적인 글쓰기 실력이지만, 핵심역량은 대통령의 생각과 사상, 국민들의 바람과 희망들을 제대로 담아내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지울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안테나를 대통령과 국민에게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연설비서관인 강원국 작가는 ‘스피치라이터는 고스트라이터’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 스피치라이터는 대통령의 유령으로 살아간다.

김동조 비서관은 약 14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파워 트위터리안입니다. 동시에 아웃사이트라는 출판사를 직접 세워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라는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전통적 개념의 글쟁이는 아니지만, 글쓰기에 나름대로 자신을 보이며 실제로도 어느 정도 친숙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식투자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김 비서관의 남다른 경험은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해 대통령의 말과 글을 더욱 탄탄하게 발전시키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취임사에 대한 두 가지 질문

김동조 연설비서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지난 5월 10일의 취임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첫 번째 대국민 메시지인 만큼, 취임사에는 그 어떤 글보다 노력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게 마련이니까요. 여기에는 대통령의 평소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말 습관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그 자체가 향후 5년간의 국정운영 방향이자 국가 어젠다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김 비서관이 작성한 초안을 윤 대통령이 직접 고치며 어렵게 완성했다고 전해집니다.

△ 연설비서와 참모진의 초안을 대통령이 고쳐 완성한다.

16분 남짓한 3340字의 취임사를 듣고 읽으며, 제가 고개를 갸우뚱한 첫 번째 부분은 각국 귀빈과 경축 사절을 일일이 호명하는 데에만 약 480字를 할애했다는 점입니다. 단순 비율로 14%나 됩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 취임사의 경우에는 3%, 문재인 대통령은 1%에 불과합니다. 이전에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던 ‘세계 시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처음 언급되면서 부연 설명이 주렁주렁 덧붙었고, 이 때문에 글머리가 비대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그럴 만한 실무적 이유와 남다른 고충이 있었으리라 짐작해볼 뿐입니다.

△ 자유를 35회 언급하고, 반지성주의를 강조했다.

두 번째로 의아했던 건 ‘자유’라는 단어를 왜 35회나 반복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굳이 플로베르의 ‘일물일어(一物一語)’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같은 표현이 한 문장과 문단 내에서 연거푸 등장하면 숨이 막히고 글의 경제성과 가독성이 크게 떨어지는 건 상식입니다. 이걸 모르진 않을 텐데, 어떤 의도로 굳이 그렇게 쓴 것인지 궁금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단어의 빈곤’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니다. 그래서 자유가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의 단어를 서른다섯 번이나 사용하기보다는, 문맥 상 보다 적확한 표현을 찾아 바꿔 썼더라면 내용 전달이 더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개선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 펀쿨섹좌? 동어반복 조심해야

내친김에 김 비서관의 책과 예전 트윗들까지 꼼꼼히 뒤져봤습니다. 그의 직업적 성공과 인간적 서사는 존중받아 마땅합니다만, 회사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의 ‘글 자체’만을 살펴볼 때 실망스러운 점이 몇 개 있더군요. 직설화법으로 말하자면 첫째, 장황하고 산만하며 둘째, 논점이 모호하고 내용 전달이 흐릿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문장들이 많습니다. 악의적으로 고르고 고른 것들이 아닙니다.  썼다고 독자가 리뷰한 부분입니다.

“그런 결정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성취들은 모두 그런 결정을 위한 외로운 과정을 거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늘 삶으로 귀결된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수가! 이건 ‘펀쿨섹좌’로 유명한 ‘고이즈미 신지로’의 글이 아닌가요. 실제로 고이즈미는 “지금처럼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일본은 지금처럼은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자주 말합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해리 G. 프랭크퍼트 교수는 저서《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에서 정치인들의 이런 화법에 대해 ‘사실과 진실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을 부각하려는 숨은 의도’라고 일침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 어딘가 비슷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펀쿨섹좌를 닮은 김 비서관의 문체가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도 자꾸 보인다는 점입니다. 윤 대통령은 ‘분명히 맞지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을 무척 고 자신있게 반복하거든요.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이러한 취임사 문장은 제가 볼 때 중학교 사회 교과서를 그대로 베껴온 느낌이 드는데요, 아무리 높게 쳐줘도 대학 리포트 수준입니다. 말과 글의 최고봉 자리에 서 있는 대통령의 말씀으로는 뭔가 미숙해 보입니다.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습니다.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입니다”라는 문장도 자세히 보면 동어반복입니다.

△ 말해놓고 뭔가 어색하면 비문이거나 동어반복이다.

정치적 평가를 배제하고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글 자체만을 떼어놓고 볼 때, 신동호 연설비서관의 글이 좀 더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출신답게 호흡, 운율, 발음, 그리고 상징들을 능숙하게 다뤘습니다. 신 비서관은 “무겁고 엄숙한 주제를 부드럽게 다루는 데 능하다”는 호평과 “핵심을 에둘러가고 지나치게 감성적이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죠. 물론, 말과 글의 완성도가 곧 대통령의 정치적 성과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이 존경과 비난을 받는 것은 유창성이 아니라 바로‘진정성’에 달려 있으니까요. 저는, 김동조 연설비서관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된 윤석열 대통령의 멋진 말과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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