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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May 23. 2018

한남동, 사라지거나 남거나

<週刊 태이리> 제5호

시간에 자유로운 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집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들만이 오래 살아남아 ‘세월’이라는 훈장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종로3가 익선동과 을지로는 새로운 모습과 쓸모로 살아남는 중이고, 인사동 피맛골은 무참히 지워졌습니다. 내 고향 한남동은 어떻게 될까요. 뭐가 남고 어떤 게 사라질까요. 그들의 엇갈린 운명이 궁금해집니다.  

   

#1. 사라진 것, 한남아파트

한남동의 시작은 승용차로는 한남대교, 지하철로는 한남역입니다. 운전을 해서 오면 옥수, 약수, 이태원, 신사, 강변대로까지 모여 있어 한남사거리가 꽤나 복잡하지만, 한남역은 아주 간단합니다.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돼?”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들고나는 문이 딱 하나니까요. 힙(Hip)한 동네라는데 설마 그럴까, 의문이 드시겠지만, 네 그렇습니다.     

▲ 한남역은 시골 간이역처럼 초라하다.

그 한남역 바로 앞에는 ‘한남아파트’라는 게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별도의 출입구 없이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슬쩍 입구에 들어서면 서울이라고 믿기 힘든 비주얼의 공동 정원이 가운데 있고, 하늘은 인사동 쌈지길처럼 뻥 뚫려 있으며, 그 하늘을 가로질러 빨래가 널려 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주성치의 코믹영화 <쿵푸허슬>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 한남아파트의 공동정원은 영화 <쿵푸허슬>과 닮았다.

이곳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음식을 만들고, 사연 많은 이웃들과 음식도 나눠 먹습니다. 왜 하필 여기였을까. 서울 한복판이면서 강남과 종로의 가장 비싼 음식부터 지독히도 서민적이고 이국적인 음식까지 한 번에 보여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요. 이곳은 2005년 즈음 사라졌고, 지금은 동원베네스트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때 참많은 친구들과 어르신들이 내밀리듯 한남동을 떠났습니다.    

▲ 만화와 현실 속의 모습은 무섭도록 닮아 있다.

 

#2. 사라지는 것, 한광교회

‘꼭대기 교회’라고 불린다는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한광교회는 한남대교와 강변북로에서 눈에 잘 띄는 랜드마크인데, 끝이 뾰족해 그런 별칭이 붙은 모양입니다. 저는 한광교회 부속유치원이었던 성진유치원을 다녔습니다. 또 학창시절에는 미션스쿨인 오산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한광교회에서 신앙생활도 조금 했고요.     


▲ 한광교회는 도깨비시장과 구불구불 이어져있다.

제가 한광교회를 다니며 좋았던 건 사실 ‘말씀’보다는 ‘야경’이었습니다. 깎아지른 언덕이라 한남역 정수리가 바로 내려다 보였고, 멀리는 하이얏트와 남산타워, 그리고 역삼동 GS타워가 한강물과 함께 별빛처럼 찰랑거렸습니다. 그게 내 자아(自我) 속에 어떤 이미지의 형태로, 가래처럼 팍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불경스럽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여기서 맥주 한 잔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흔히들 북악스카이나 낙산공원을 서울 야경 명소로 꼽는데, 그건 분명 여길 잘 모르고 하는 말 같습니다. 와서 보면, 제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바로 알게 됩니다.

▲ 한강 배경의 강남 야경, 아마도 이건 여기에만 있다.



한광교회에 가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살아남아 세월의 흔적을 몸에 새기면 참 좋겠는데, 아쉽게도 ‘철거’하기로 2017년에 결정했거든요. 제가 한남초 아닌, 한남국민학교 다니던 1980년대부터 재개발을 노래처럼 불렀는데, 막상 이렇게 결론이 나니 좀 먹먹하고 씁쓸합니다. 한남동 모습들이 제 기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데, 몽땅 사라지기 전에 다시 둘러 봐야겠습니다.   

 

#3. 살아남는 것, 이슬람성당

한광교회가 정말 사라지고 나면, 한남동의 스카이뷰는 좀 외롭고 심심해질 것 같습니다. 30여년 넘게 지켜온,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스륵 깨지고 말 테니까요. 이슬람성당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한쪽에 한광교회가 있어야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남동 뉴타운 개발계획이 심사숙고해 잘 결정된 건지 자본주의 논리에 휘말린 건지, 원망과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남기려면 이번 주라도 가는 게 좋겠습니다.

▲ 어떤 날은 이곳이 마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독교 세례를 받았지만, 집에서 5분 거리인 이슬람성당에도 종종 갔습니다. 상아빛 하얀 계단 아래 앉으면, 비행기를 타고 중동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느낌에 금세 사로잡혔습니다. 목사님이 그때 알았으면 깜짝 놀라셨겠지만, 맨발로 이마를 바닥에 대는 기도를 드려본 적도 두어 번 있습니다. 뭔가 낮고 은은한 향이 코를 간질이고, 기도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얼거림이 귓가에 와 닿았는데, 그 낯선 기분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뭔가 애잔한 느낌이 들어서, 소주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실 겁니다. 백지영이 자주 갔었다는 그 앞 ‘숙이네 분식’에서 골뱅이 안주 포장하시면 됩니다.  




▲ 숙이네 분식은, 숙이네 닭발로 바뀌었다.

저는 한남동의 변화를 살아오면서, 이곳이 서울, 좀 더 자세히는 강북의 역사를 온 몸으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종종 합니다. 종로와 광화문 일대가 강북의 대장 격이라면, 기묘한 것들이 뒤섞인 한남동은 그 행렬의 맨 앞에 선 첨병 같습니다. 한남동은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뀔 테고, 저는 그걸 다시 기록할 겁니다. 자기가 살아낸 장소를 기억하는 건, 옛 연인을 애써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곳에 다녀와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특권입니다. 저는 한남동을 잊지 않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시키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할 때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생겨나면 그 뒤에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입니다. 농담으로 시작했지만 몸집이 커지면서 하나의 맥락(Context)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2. <週刊 태이리>는 주1회 수요일 발행을 원칙으로 하되, 가능하면 목요일에도 추가 발행하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1회 경험과 지식을 쥐어 짜 글에 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네요. 마감을 어기지는 않겠습니다.


3. 지난 4호는 글쓰기 칼럼이었고, 이번 5호는 ‘한남동’입니다. 6호는 다시 ‘스피치라이터의 사(社)생활’이고요. 문의나 제안 사항은 언제든지 카톡과 전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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