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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May 30. 2018

글 못 팀장, 숫자만 상무

<週刊 태이리> 제6호

‘쓰지’ 못하는 이 팀장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지시대명사가 넘쳐났고, 아무 데나 조건이 붙었고, 물음표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거, 일단 그렇게 하든가, 아니면 저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팀원들은 수수께끼를 푸느라 낑낑댔습니다. ‘읽지’ 못하는 김 상무도 있었습니다. 그는 숫자로 된 보고만 받았는데, 말씀자료는 보지도 않고 같은 질문만 반복했습니다. “몇 글자야?”    

 

#1. 글은 생각이다

직장인은 좋든 싫든 ‘글’을 씁니다. 홍보팀 직원이나 저 같은 스피치라이터만 그런 게 아닙니다. 숫자와 싸움하는 회계부서, 법전을 뒤지는 법무팀, 고객을 설득하는 영업팀, 현장의 엔지니어, 심지어는 이미지로 말하는 디자인팀도 글을 씁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만 다르죠. 생각해보면, 직장인의 삶은 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력서, 이메일 답장, 회의 약속, 보고서, 기획안, 심지어는 사표까지 그게 다 글입니다.       

▲ 글은 생각이고, 그 사람의 거의 절반이다.

업무를 공유하고 지시할 때 말은 뭔가 부족합니다. 통화를 마치면 반드시 글로 남기는 게 좋습니다. 다 같이 확인하고 살펴봐야 하거든요. 이걸 자꾸 미루거나 피한다면, 혼자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글이 흐릿하면 생각이 성기고 논리의 빈틈이 많다는 건데, 그 일이 잘 될 리 없습니다. 아니, 잘 해 볼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몸보신 조직에는 그저 욕만 안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바닥에 쫙 깔려 있습니다.      

▲ 글 못 쓰는 팀장과 보낸 시간들은 이랬다.

글은 ‘생각’입니다. ‘이 팀장’이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사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로 대충 뭉개면서 기록도 하지 않습니다. ‘요청사항을 이메일로 주십사’ 비굴하게 부탁을 해도 ‘읽씹’합니다. 늘 애매하게 말해서 실무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기 일쑤입니다. 운 좋게 잘되면 ‘그게 바로 내 생각’이고, 망하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라며 그 모호함 속에 숨어 버립니다. 팀원을 체스판 위에 올려두고 사내정치도 종종 합니다. 자기 생각조차 ‘쓰지 못하는’ 이 팀장 같으신 분들은, 작게는 회사, 크게는 나라도 말아 드실 분들입니다.  

   

#2. 글은 숫자보다 힘이 세다

이젠 ‘김 상무’ 이야기를 해 볼게요. 그의 오랜 믿음처럼, 회사의 일은 ‘숫자’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맞아요. 매출, 영업이익, 투자비, 회전율이 모두 숫자라는 거 인정합니다. 숫자는 메시지의 왜곡을 줄여주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잘 하자!”보다 ‘2020년 영업이익률 5% 달성’이라고 말하면 커뮤니케이션을 표준화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숫자로 이루어진 세상은 허점이 없고 얼핏 완전무결하다”고 믿습니다.    

▲ 종로 김 상무랑 정말 닮았다. (출처:tvN)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입니다. ‘숫자가 전부’라는 함정에 푹 빠져 있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그는 숫자가 아닌 모든 걸 의심하고 ‘얼치기’라며 조롱하길 즐겼습니다. 반쯤 미치광이였던 김 상무 앞에서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지만, 숫자는 상징이나 기호에 불과한 겁니다. 숫자의 힘은 세지만, 그것을 나열만 해서는 아무런 맥락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속에 담긴 뜻을 ‘자음과 모음’으로 바꿔줄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쁘다” “행복해” “사랑해”라고 말하지 ‘0과 1’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 김 상무는 어쩌면 0과 1로 대화할지도 몰라.

글은 숫자로 셀 수 없습니다. 2는 1보다 항상 크지만 “축하해”라고 두 번 썼다고, 한 번보다 더 축하하는 게 아닙니다. 김 상무는 “많은 게 좋다”는 미신에 사로잡혀서 “고맙습니다”만 여러 번 적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는데, 그게 얼마나 촌스러운 건지 아마도 관에 눕기 전까지 모르실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상상력 부족과 어휘의 빈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 와서 얼마나 기쁜지’를 보여주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사람들은 숫자 너머의 여백을 스스로 채울 줄 압니다. 그게 바로 숫자에는 없는 문맥(文脈) 즉, 콘텍스트(Context)의 힘입니다.         

  

#3. 가장 좋은 글은 내가 써야 한다

글은 ‘생각(Thought)’입니다. 그것도 ‘자기’ 생각입니다. 단단한 자기 생각을 가지려면 자신과 그 주변을 끈질기게 관찰해야 합니다. 좋은 표현을 인용 하고, 다양한 입장들을 쪼개고 붙이는 과정에서 내 생각이 더 날카롭고 분명해집니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도 쭉 살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왜, 언제, 어디에, 어떻게” 놓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 육하원칙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다.

글은 ‘이야기(Story)’입니다. ‘난(I) 그때 어땠더라, 너(You)는 이랬었나, 그 사람(He, She)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기억을 되짚어 보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이 팀장과 김 상무‘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야기 없이 생각만 꽉 찬 글은 막걸리와 김치 없이 보쌈고기를 꾸역꾸역 먹는 것과 같거든요. 반대로 이야기만 가득한 글은 금세 허기가 집니다.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 내 생각이 틀리진 않았을까’ 이런 걱정이 먼저 드시겠지만 용기를 내세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이 세상에 똑같은 생각이나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 천상천하유아독존, 내 이야기는 여기 딱 하나뿐

어떤 글이 가장 좋은 글일까요. 바로 ‘내가 쓴 글’입니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는 “사랑하는 아내가 원고지 한 장 대신 써줄 수 없고, 사랑하는 아들도 마침표조차 대신 찍어줄 수 없는 게 글쓰기”라고 말했습니다. 노트북을 켜고 또라이 이 팀장 욕을 하고, 양아치 김 상무를 열심히 씹으면 그게 직장인의 가슴을 뒤흔드는 글이 될지 누가 알까요. 어느 조직에나 이 팀장과 김 상무가 있거든요. 한참 어렵게 떠들어댔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뭐라도 써지는 게 글쓰기입니다. 쉽게 시작해보세요. 아참, 오늘 처음 해보니 그림도 도전해볼만한 것 같습니다. 내 색깔대로 그리면 뭐든 되니까요.  


▮ 덧붙이는 말 ▮    

1. 커버 이미지는 ‘직접’ 만들어 봤습니다. 선을 긋고 지우고 다시 채우면서 완성했는데, 그림도 글쓰기와 비슷한 게 많네요.    


2. ‘글쓰기’를 어떻게 풀어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 팀장과 김 상무’가 생각났습니다. 이 글이 돌고 돌아 그 두 분에게 꼭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3. 독자 분들의 응원덕분에 5월호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6월호 연장 구독하시면 눈이 편안해지는 ‘아이온팩’을 보내드립니다. (월 9,900원 / 카카오뱅크 3333-0527-66818)    

 

4. 제1호 발행한 <아무나 모르는 한남동>이 3만 2천 조회 수를 넘겼습니다. 깜짝 놀랐네요. 고맙습니다. 좋아요, 댓글, 공유, 그리고 낮술 환영.     


5. 저는 사내에서 <직장인의 내책 쓰기> 강연을 합니다. 강연 자료는 독자 분들께도 도움이 될듯하여, 카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6. 조만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글쓰기, 한남동, 책쓰기’를 주제로 합니다. 시키지 않으셔도 묵묵히 합니다. 반응이 별로여도 민망해하지 않습니다. 땅 부자가 아니라, 콘텐츠 부자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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