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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un 06. 2018

한남동의 학교, 학교, 학교

<週刊 태이리> 제7호

며칠째 한 줄도 적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이라고 부르더군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나, 살펴봤는데, 맨부커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의 ‘한강’은 “쓸 것의 목록을 만들어 본다”고 합니다. 좋은 건, 바로 따라해 봅니다. 한남동, 한남대교, 순천향병원, 이슬람사원과 한광교회, 한남아파트와 유엔빌리지, 한남초와 학창문방구, 오산중고교와 그린서적, 81번 버스종점, 남산도서관, 단국대까지 수십 개의 단어를 빼곡하게 적습니다. 노을처럼 가물거리는 학창시절에 마음이 머뭅니다.


#1. 한남동 터줏대감, 한남초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10차선 도로가 있는 한남더힐(옛 단국대) 앞에는 작은 개울이 졸졸 흘렀습니다. 한남초등학교(당시 한남국민학교)를 가려면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어요. 오고가는 길에 아이들은 거기서 개구리를 잡거나, 순천향병원 앞 공터에서 땅강아지를 잡았습니다. 뻥 같죠? 가끔 쉬는 날에는 한남대교를 넘어 한강까지 방아깨비를 잡으러도 갔다니까요. 정말 거짓말 같죠. 하긴 저도 “압구정동이 원래는 배[梨]밭이었다”는 어르신 말씀이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여겨지니까요. 그런데 이건, 좀 믿어주세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30년 전 한남동의 평범한 모습은 이랬습니다.

▲ 한남초(좌)와 남산터널(우) 모습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놀랄 만한 일은 더 있습니다. 제가 한남초를 다닌 게 1987년부터 1992년인데, 그때는 ‘시조(時調)’ 쓰기가 대유행이었습니다. 맞아요, 그거! 고려 말기에 시작돼 조선시대 선비들이 읊었다는 정형시, 글 꽤나 쓰는 사람들이 부르는 일종의 노래죠. 그게 요즘 아이들 ‘코딩(Coding)’만큼 인기가 있었습니다. 매월 교장 선생님이 뭘 쓸지 정해주는데, 대부분 ‘충(忠)·효(孝)·예(禮)’였습니다. 제가 일기를 빼먹다 아버지에게 들켜 혼이 났는데, 달 주제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밉고 슬픈데, 시조는 써야겠고. 그 복잡한 원망어린 마음을 에둘러 썼는데 상을 덥섭 주더라고요. ‘아, 글은 솔직하게 쓰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이때 처음 한 것 같아요.  

▲ 사실은 소리 지른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쓴 거다.


1980년대 교가(校歌)는 다들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노랫말에 산(山)이나 강(江)이 꼭 들어가죠. 한남초 교가도 그랬어요. 한남동(漢南洞)답게 ‘한(漢)강과 남(南)산’이 당연히 나옵니다. “무쇠 같은 굳은 마음, 남산에 띠고♬, 변함없는 한강물을 기상 삼아서~ 굳게굳게 씩씩하게♩ 같이 손잡고, 나~아~가자! 장래 일군 한남 어린이!” 신기하게도 노랫말이 아직 그대로더라고요. 새마을 운동하는 군인들의 노래 같죠. 어딘가 자연 현상을 신성시하는 ‘토테미즘’마저 느껴집니다. 한 번 유튜브로 들어보세요. https://youtu.be/UAXUa8b1pqA 


#2. 한남동 품은, 오산학교 

한남동에선 대부분 오산(五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여기에는 강남과 강북 출신이 기묘하게 섞여 있어요. 한남동 토박이가 절반, 4분의 1은 보광동과 옥수동, 나머지는 반포나 논현 쪽에서 왔습니다. 한남동 애들은 굉장한 부잣집이거나 형편이 그럭저럭 어려운 아이였고, 보광동과 옥수동은 싸움 잘하고 소개팅도 잘하는 날라리가 많았습니다. 반포나 논현 애들은 강북에서 내신등급을 올려보려는 얄팍한 생각이거나, 말썽 부리고 엄마 따라 강북 온 마마보이였습니다. 하하로 더 잘 알려진 ‘하동훈’이 강남에서 넘어온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였는데, 뭐 저랑은 관심이 달라 서로 잘 몰랐습니다.

▲ 모자이크 당할 줄 이땐 몰랐다. ©연합뉴스

그얘가 좀 알려진 건, 1학년 수학여행 때였습니다. 반별 장기자랑을 하는데, 어떤 놈이 이번에 발표하는 신곡이라면서 랩을 하더라고요. 게다가 프로필 사진에 사인까지 떡하니 박힌 CD를 꺼내 나눠주는데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남자 고등학교인데 여자 백댄서까지 두 명 데려왔고요. 저는 ‘선생님이 저걸 왜 가만 두고 계신 걸까?’ 이런 생각뿐 별 관심 없었습니다. 흥, 행복은 성적순이니까요. 그런데 대학생 때 청춘 시트콤 <논스톱>에 그 친구가 나오더라고요. “헉!” 다들 공부가 전부라 믿었던 고딩 시절에, 어쩌면 그는 자기 인생을 미리 계획한 건 아닐까 합니다. 잘은 몰라도, 지금 모습이 우연은 아닌 건 확실할 것 같습니다. 젠장,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더라고요.

▲ 이게 그 CD, 이미 소개된 사연이다.©KBS

아참, 중고등 6년을 오산학교에 다녔는데, 졸업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입구에서 교실까지 경사가 높고 멀어서 아무리 뛰어도 10분은 족히 걸리는데요, 그 길을 ‘건강로(健康路)’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런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들으니 ‘다리가 건강하다’는 뜻의 ‘건각로(健脚路)’더라고요. 아직도 후배들 대부분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보광동 지나시면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촬영했다는 '종점 숯불갈비'에 한 번 들르시고, 힘들지만 오산학교에 올라와 보세요. 반포대교와 잠수교가 바로 보이는 멋진 풍경이 일품입니다. 곧 찍어 올릴게요. 일단은 다른 사진.

▲ 여기서 ‘고독한 미식가’를 촬영했다. 오산학교 앞이다.


#3. 한남동 떠난, 단국대

선생님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 저 똥통 학교!" 중고등학교에선 이런 말을 자주 들었죠. "니들 그렇게 놀기 좋아하다가는 단국대 간다!” 어릴 때라 대학생 형 누나들이 왜 데모라는 걸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손가락질 하니 그런 줄만 알았죠. 고3때 반에서 15등 쯤 하던 애들에게 ‘너 그러다 단국대 간다’고 말하면 바로 멱살을 잡았습니다. “너 죽을래?” 그런데 웬걸, 수능성적표를 받아보니 반에서 5등을 해도 단국대 가기가 어렵더라고요. 공부 잘 하는 걸 최고로 쳐주는 90년대 교육 현실 속에서, 똥통은 단국대가 아니라 오산학교였던 거죠. 아 창피해. 암튼 다들 가까운 데 있는 건 우습게 여기나 봅니다. 그런데 신림동 사는 친구들도 이런 말을 했을까 궁금해집니다. “너 자꾸 그렇게 개판 치다가는 서울대 간다”

▲ 지금의 한남더힐은 2007년 전에는 단국대 있던 자리다.

모교를 낮잡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사실 오산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민족학교라는 자부심이 무척 높은 명문입니다. 역사 교과서에도 나와요. 하지만 또 다른 시선으로 보면 ‘SKY 진학률’이 서울 평균을 밑도는, 강북의 오래된 학교일 뿐이었습니다. 수능 다음날 논술 준비하는 친구보다, 생활정보지 벼룩시장을 뒤지며 이태원 호객행위, 속칭 삐끼 알바자리 찾는 놈들이 더 많았을 정도니까요. 대선배님인 시인 김소월과 백석, 종교인 주기철, 사상가 함석헌, 화가 이중섭이 알면 꽤나 슬퍼하실 일입니다. 이태원 삐끼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볼게요.

▲ 단국대는 이제 막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단국대는 제가 참 좋아하던 놀이터입니다. 대학생 문화를 엿보려고 고딩 주제에 중앙도서관에도 자주 갔습니다. 지금 리첸시아가 있는 후문 쪽 개미식당에서는 3천원 백반을 넉넉하게 팔았고, 한남오거리 태백산맥에서는 싸구려 팝콘과 김 빠진 맥주를 뻔뻔하게 팔았습니다. 거기선 늙다리 고등학생에게도 기꺼이 술을 내줬죠. 한남동 상권의 절반 이상을 단국대가 만들어냈는데, 2007년 서울캠퍼스를 죽전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상권 협회가 크게 반발했습니다. 다 죽는다고요. 그런데 뭐, 한남동은 겉보기엔 잘 돌아갑니다. 시속 400㎞로 쌩쌩 달리죠.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소년이었던 ‘한남동’은 2010년 전후로 화장을 덧칠하며, 알을 깨고, 소년에서 성인이 됐습니다.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이 안 써진 적이 지난 35년간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헐, 허세 쩔어. 뭐 분과 비교하면 저는 평생 좌절감만 맛보게 되겠죠. ‘아냐, 한남동만큼은 하루키도 나처럼 쓸 수 없어!’ 이렇게 자존감을 달래며 ‘자, 이제 써보자’라고 중얼거립니다. 어떻게든 소설 <한남동 원주민>을 시작하고 결국 완성까지 해버려야겠다는, 꽤 독한 각오를 해봅니다. 뭐라도 쓰자.


2. 저는 글쓰기를 시작할 때마다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먼저 합니다. 힘들게 마치고 나서 내 글을 다시 보면 ‘겨우 이 정도구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제 브런치는 업데이트 하고도 수십번씩 고친답니다, 소개팅에서 화장을 고치듯. 이건 모르셨죠? 오산학교와 한남초 사진은 곧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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