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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May 25. 2018

스피치라이터를 아세요?

<週刊 태이리> 2호

저는 ‘스피치라이터(Speech Writer)’입니다.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 신년 행사가 몰리는 연말은 꽤 바쁘고, 사장 이취임이나 큰 MOU가 있으면 눈코 뜰새 없어집니다. 난주 정년퇴임하시는 분들에게 축사를, 순직사원 위로행사에서 추모사를, 그리고 준공식 격려사를 쓰고, 고치고, 쓰고, 고쳤습니다. 정체가 뭔데 이런 일을 하냐고요.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저는 스피치라이터입니다.


#1. 축하부터 사과까지 쓴다

스피치라이터는 리더의 ‘말씀’을 씁니다. 행사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연설문’이 제일 많고 대표적입니다. 신년사와 창립기념사, MOU 인사말, 준공이나 개소식 축사, 만찬 건배사까지 여기 넣습니다.        


그 다음은 ‘경영서신’입니다. 설이나 추석 즈음 윤리경영 동참을 독려하고, 대표 이취임이나 사업 통폐합 같은 굵직한 변화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요새는 CEO 일상을 소소하게 담는 캐주얼한 시도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편지라는 게 어딘가 아날로그 감성을 띄기 때문에 잘만 쓰면 효과가 꽤 좋기 때문이겠죠. 

▲ 스피치라이터가 쓰는 글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다

    

매체에 싣는 ‘칼럼’도 씁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사안을 직접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한 마디 더해야 할 때, 에둘러 말하는 방식입니다. 사회적 이슈와 기업의 현안을 절묘하게 잡아채는 게 관건입니다.    


가장 어렵고 쓰기 힘든 건 ‘사과문’입니다. 표현 하나가 모두 미묘해서 신경이 예민해집니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먹은 게 입에서 항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체질인데, 대한항공에서 일했더라면 아마  만성설사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 그전에 그만두었을 테고. 아무튼 사과문은 원칙을 정해두고,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게 차선입니다. 최선은 사과할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거죠.    


#2. 은밀하게 쓰고, 끈질기게 고친다

스피치라이터의 첫 번째 덕목은 ‘보통 수준 이상의 글쓰기 실력’입니다.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청와대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조금 넓히게 됐습니다. 특히 ‘근로자의 날’ 메시지는 한 편의 시(詩)더라고요. 문학 수업시간에나 듣던 표현을 대통령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이야. 시인 출신 신동호 연설비서관의 과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이 잘 합쳐진 덕분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 이전까지 못 본, 새로운 스타일의 감성적 연설문이었다


두 번째 덕목은 ‘투명성’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스피치의 주인은 ‘쓰는 사람(writer)’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Speaker)'입니다. 철저하게 나를 숨기고, 그분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제나 내용은 기본이고, 분위기나 문체, 뉘앙스, 그리고 개인적 말버릇까지 오롯이 담아내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의 속마음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리더 그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런 농담을 들을 때마다, 이러다 맨발로 작두라도 타야 하는 건 아닌지 사뭇 걱정까지 듭니다.     

▲ 최면을 배우면 도움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셋째는 ‘인내심’과 ‘체력’입니다. 스피치라이터는 수십 번 깨지고 탈탈 털리는 게 일상입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신년사를 확정한 적도 몇 번 있었고, 창립기념사에 영혼이 담기지 않았다고 다시 쓴 적도 여럿 있었습니다. 리더의 철학과 조직의 비전,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런 것들을 자음과 모음으로 붙잡아 위대한 말씀으로 바꿔내는 게 쉬울 리 없습니다. 혹 내가 쓴 말씀자료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더라도, 타율을 높여가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 현장에서도 수십번 고치기 일쑤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


#3. 그분께 가 닿기를

스피치라이터는 우리나라보다 백악관에서 그 역사가 더 깊습니다. “뭘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나라를 위해···”라는 케네디의 명연설은 소렌슨이라는 변호사가 썼습니다. “나는 유턴(U-Turn)하지 않아요. 당신이 돌아 서세요(You Turn!)”라는 마가렛 대처의 말씀은 극작가 밀러가 썼습니다. 레이건에게는 페기누난이라는 방송제작자가 있었습니다.     

▲ 변호사, 극작가, 방송제작자까지 그 출신이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스피치라이터가 세상에 드러난 계기는 국정농단이 아닐까 나름대로 분석해봅니다. 최순실이 박근혜 前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쳤다는 게 알려지면서, 故김대중·노무현 前대통령 연설문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니까요. 워낙 글도 좋은데, 이런 시대적 흐름의 큰 힘까지 받아 강원국 작가의 <대통령의 글쓰기>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 위트 넘치는 트위터, 나도 여러 권 사서 싸인 받았다

뭐 다 아는 듯 까불며 말했지만, 고백하자면 저는 홍보인으로 오래 지내다가 스피치라이터로 모습을 바꿔 살아온 날이 민망할 만큼 짧습니다. 요사이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이 자리를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겨우 실감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것과 리더의 신뢰를 얻고 조직의 응원을 받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정성들여 쓴 글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슬픈 일이 있더라도, 그분만의 단어와 표현을 찾아드리려고 고민 또 고민하면서 애쓰고 있습니다. 제 노력이 그분께 온전히 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 덧붙이는 말 


1. 홀수는 한남동, 짝수는 스피치라이터의 사생활에 대해 씁니다. ‘내가 나고 자란 곳’과 ‘내가 먹고 사는 것’만큼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2. <週刊태이리>라는 이름으로, 매주 1회 글을 씁니다. 이 글은 개인 매거진에 실었던 내용을 손 봐 올린 것입니다. https://brunch.co.kr/@30story/9 


3. 스피치라이터라는 저의 낯선 직업을 많은 분들께 꼭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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