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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ul 11. 2018

스피치라이터의 사생활

<週刊 태이리> 제12호

“글 쓴다”고 하니, 다들 바쁜데 너만 신선 음하냐는 엉뚱한 을 들었습니다. 왜요, 세상엔 그게 일인 사람도 있다요. 장례식장에서 상주(喪主)보다 더 구슬프게 울어주는 사람도 있고, 이별을 대신 해주는 사람도 다 있는데,  쓰는 직업이 회사에 없을 이유가 없습니다. 좀 낯설게 느끼실  있지만요.   

  

#1. 글쓰기 버튼 누르기

스피치라이터가 쓰는 말의 주인은 그가 속한 조직의 리더입니다. 원장님, 사장님, 회장님, 장관님, 그리고 대통령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죠. 그 분야에서 소위 정상에 선 사람들입니다. 제가 조금 가깝게 본 그 분들의 스케줄은 신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가끔은 땅콩이나 물잔을 내던지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 앉아 ‘주민등록증’을 최고의 스펙으로 삼으신 거겠죠. 최근에는 직원들더러 엉덩이춤을 추라든가, 사랑한다며 장미꽃을 접게 하는 분도 생겼다고 하는데, 저는 존경심 가질 만한 분들만 모셔서 참 다행입니다.     

▲ 아마도 이게 다는 아닐 거다.

그분들께서는 할 말이 있으셔도 시간 내기가 어렵습니다. 툭 하고 한 말씀 하시면 그게 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잘 써봐!” 신기하게도 이걸 다들 잘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잘 담긴 완성된 글을 빨리 준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일이 눈앞에 딱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해외 출장 중이셨는데 그쪽에선 낮이지만, 한국은 밤 11시였습니다. 5시간 후면 인천공항 내리실 테고, 사무실 오시면 8시쯤입니다.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고작해야 인저리 타임까지 최대 9시간였습니다.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 고쳐 쓰는 것까지 다 포함되어 있으니, 오늘 잠들기는 글렀습니다.   

▲ 머리 열고 나사 조이고 글쓰기 버튼 누른다.

비서실 문자를 받자마자, 홍보실, 기획처, 현업부서, 연구소에서 카드빚 독촉하듯 전화가 쏟아집니다. “그거 들었죠?” 긴급회의가 자정에 소집됩니다. 운동화, 추리닝, 눌러 쓴 모자, 다들 아무렇게나 달려온 게 틀림없습니다. 뭘 어떻게 쓸지 회의(會議) 하느라 30분이 아깝게 지나갈수록, 저는 점점 더 초조하고 회의(懷疑)적으로 변합니다. ‘과연 이걸 시간 내 쓸 수 있을까’ 불안감이 가스처럼 대장에 가득 차면서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은 바늘처럼 따갑고 귀가 윙윙 울립니다.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글쓰기 전원을 꽉 누릅니다.

   

#2. 미리미리, 오물오물, 겨우겨우

글이라는 게 말로는 참 쉽습니다. 다들 입으로만 그러지 마시고, 한 편씩 써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 하면  잘리겠죠?) “일단 쉬고 계세요. 제가 어떻게든 초안 써볼 테니, 새벽 6시에 다시 뵙죠.” 안쓰러움과 걱정, 불신과 희망이 제 손가락 위로 동시에 쏟아집니다. “힘내, 아침에 보자고!” 이런 말이 고맙기도 한데,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항문에서 올라온 신물이 목구멍에 턱턱 걸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마침표 하나도 대신 찍어 줄 수 없는 게 바로 글쓰기다”라던 조정래 작가의 탄식이 가슴에 턱하고 박힙니다.       

▲ 글은 일단 어떻게든 혼자서 쓰는 것뿐이다.

이럴 땐 평소 수집해둔 자료들이 큰 힘을 발휘합니다. 국내외 산업현황, 선진국 사례, 정책보고서, 연구소 통계, 전문가 인터뷰, 관련 서적을 주욱 돌아봅니다. 깊이 들쳐볼 시간은 없습니다. 어디 뭐가 있었고, 그게 지금 여기에 들어와야 한다는 걸 빠르게 생각해 내야 합니다. 제가 새롭게 만든 건 없지만, 만들어진 건 모두 새롭습니다. “글은 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하신 강원국 청와대 前 연설비서관의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평소 물고기를 잡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바로 꺼내, 찌고 굽고 삶고 회를 칠 줄 알아야 합니다. 손님 막 들이닥치는데 주섬주섬 낚싯대 꺼내선 안 됩니다.     

▲ 장사 오래 하려면 물고기는 미리 잡아둬야 한다.

이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건 그분 말씀을 평소 모아 둔 ‘명언록’입니다. 그걸 보며 해골 같은 초안에 숨결을 불어 넣습니다. 경영회의록과 행사 인사말 녹취록은 물론이고, 술자리 농담까지 키워드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페이스북 포스팅과 친구들과 주고받는 댓글까지 모두 수집합니다. 이게 제 영업비밀입니다.    

▲ 웬만한 사회이슈와 좋은 표현은 여기 다 있다.

저의 독특한 습관은 ‘청와대 연설자료실’을 더 살펴보는 겁니다. 때에 따라 핫 트렌드나 신세대 농담을 적절하게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물오물해서 겨우겨우 글을 씁니다. 동이 트고 글이 모습을 갖추면, 꿈결 속에서 회의가 다시 열립니다. 초안이 그분께 가 닿고 나면, 피드백이 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입니다. 이후 계속 고쳐야 하겠지만, 마지막 퇴고는 항상 그분의 몫입니다. 모두가 함께 만든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주인은 그분이니까요.


#3. 회사에서 글쓰기로 일한다는 것

제가 쓰는 글은 문인(文人)들의 ‘작품(a literary work)’과는 다릅니다. 처음엔 멋진 말만 쓰려다가 혼이 몇 번 났습니다. 저는 글(Writing)을 쓰는 게 아니라, 글로 일(Job Business)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여러 부서가 복잡하게 엉켜 있고, 2만여 직원과 어쩌면 5천만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는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은 그분과 바로 연결됩니다. 혼자서는 제대로 할 수 없고, 혼자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게 ‘스피치라이터(Speech Writer)의 일’입니다. 그저 이미지만으로 고상하다고 하시는 분도 계신데, 뭘 모르는 말씀입니다.    

▲ 그분 마음을 아는 건 작두타기만큼 어렵다.

가끔은 ‘글 쓰는 자판기’가 된 것 같다고 한숨 섞인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그건 환절기마다 걸리는 작은 감기 같은 거고, 저에게 글 쓰는 건 여전히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고, 그것이 큰 수정 없이 통과되었을 때 안도감과 희열이 온 몸을 감쌉니다. ‘아, 이제 또 하나 썼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실론티 한 잔을 마십니다. 제 자신에게 주는 나름대로의 작은 보상니다. 제가 쓴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귀한 시간을 벌어드리고, 그분 최고의 모습을 찾도록 돕습니다. 그걸 못하면 제 밥벌이가 어려워지기도 하고요. 스피치라이터가 변호사나 회계사처럼 자격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어렵고 전문성 있는 일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그게 있으면 벌써 땄겠죠.        

▲ 전문가에게 맡기는 건 이유가 다 있다. 글도 그렇다.

아, 아까 쓰던 그 글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홍보, 기획, 연구 세 파트에서 보다 전문적인 의견을 주면서 글이 처음보다 단단해졌습니다. 엉망이라면 바로 불호령이 있을 텐데, 삼십 분 넘게 조용합니다. 오후 두 시, 그분께서 일부 고치셨지만 오케이 하셨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휴, 다행’ 제가 조금 더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피치라이터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꽤 치열합니다. 기업도 이런데 청와대 스피치라이터는 얼마나 더 힘들까요.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나지만, 꼭 도전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 덧붙이는 말 ▮    


1. 매주 수요일 진행한 사내 특강 ‘직장인의 내책쓰기’가 오늘(6.11) 끝났습니다. 4회 차로 진행했는데, 50명이 수강신청해서 25명이 선정되었고 그 중 12분이 개근을 하셨습니다. 자기탐색, 출판기획서 쓰기, 트렌드 읽기, 문장쓰기를 차례대로 하고 책머리를 쓰고 추천사를 받는 가상의 출판기념회를 했습니다. 좋은 경험입니다. 유튜브에 이번 강의를 쪼개서 올려볼 생각입니다.    


2. 여름휴가는 다들 다녀오셨는지요. 덥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3. 글 쓰느라 일은 안 하는 거냐는 독자 분이 계셨습니다. 설마요. 글을 쓴다는 건,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선 불가능합니다. 퇴근 후 쓰고 주말에 쓰고 출퇴근 길에 쓰고,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앞에 두고도 씁니다. <週刊태이리> 발행인으로서, 제 일을 잘 해내면서, 제 글도 쓰는 프로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조언, 충고, 걱정, 제안 모두 참 고맙습니다.    


4. 제가 하는 일을 에피소드로 소개했는데, 매일 저러진 않습니다. 소소하게 신문과 책도 보며,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평화로운 일상도 있습니다.    


5. 청와대 前 연설비서관인 강원국 선생님께서 <강원국의 글쓰기>라는 세 번째 책을 내셨습니다. 대가의 글쓰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들 한 권씩 구입하시면 어떨까요.

http://naver.me/F1j3mx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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