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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ul 04. 2018

한남동, 맛과 멋 그리고 추억

<週刊 태이리> 제11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남동이요”라고 하면 잘 모르시는 분이 여럿 계셨습니다. “이태원 옆이요”라거나 “순천향병원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말해야 더 잘 알아들었습니다. 뭐, 작고 조용한 동네였으니까요. 요즘엔 지인들과 약속할 때 한남동이 종종 1,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바뀐 거예요. 일상처럼 오가던 식당들이 연예인 맛집으로 TV나 인터넷에 자주 소개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낯선 기분이 듭니다. 서촌이나 북촌이 고향이신 분들도 이런 묘한 느낌을 오래 전에 받으셨겠죠.

   

#1. 밤, 한남동에서 먹고 마시고

한남동의 약속장소는 한남오거리 골목에서 시작됩니다. 전국에서 기름 값이 가장 비싸다는 제3한강교 GS주유소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신한은행이 줄지어 서 있고, 그 길을 따라 순천향병원 앞까지 먹자골목 메인 스트림이 펼쳐집니다. 송중기, 송혜교, 유아인이 추리닝입고 스태프들과 어울려 백상예술대상 뒤풀이를 했다는 그곳입니다. 아, 여기 오산고 동기인 하동훈도 어릴 때 가끔 왔었습니다. 아무튼 이곳엔 세월의 때가 묻은 오래된 노포들이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청담동에서나 볼 만한 인테리어가 제법 들어와 있습니다. 손 써보기 어려울 정도로 낡았던 가게는 그 흔적을 그대로 살린 빈티지 숍으로 몽땅 변했고요.    

▲ 한남오거리 입구는 늘 어수선하다.

저 같은 한남동 원주민들은 메인 스트림으로 잘 안 들어갑니다. 어쩐지 바깥 사람들에게 점령당한 것 같아서요.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그 대신 한남역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미로 구석구석 숨은 데를 잘도 뒤져 찾습니다. 코끼리분식과 다원통골뱅이, 한남북엇국, 민물횟집 소양강, 동아냉면,  중국 요리집 현경, 래리성 같은 곳들이요. 여기엔 동네 할아버지들이 슬리퍼 신고 와 계시거나, 유모차를 끈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요. 주택가 바로 앞에 있어서 다들 편하게 나오십니다.     

▲사실 뭐 별거 없는 맛인데 가끔 좀 생각난다.

오래된 가게 중에는 언론의 관심을 피하지 못한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명소가 된 곳들인데요, 한남파출소 앞에서 길가에 테이블을 내놓고 팔던 한방통닭이 그 중 하나입니다. 편의점에서 맥주랑 과자를 사다 마시기엔 좀 모양 빠진다고 생각할 때, 따로 줄 서지 않고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여기였습니다. 이영자가 체했을 때 먹는다며 우스개처럼 ‘전지적 참견시점’에서 소개했는데, 어느 날 보니 줄 서지 않으면 감히 먹을 수 없는 귀하신 몸이 됐습니다. 방송이 이렇게 힘이 세고 무서운 거죠. 저도 방송 한 번 타고 싶습니다.

 

#2. 낮, 한남동에서 걷고 즐기고

한남동은 술 약속으로 밤에 오는 것만 아니라, 낮에 와도 뭐 괜찮습니다. 한강진역과 바로 이어지는 ‘블루스퀘어’에서 뮤지컬 한 편 보고, 주변 나무그늘을 잠시만 걸어도 기분이 개운해집니다. 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가지 마시고,  앞 야외로 나와 보시길 추천합니다. 거기서 한남대교 쪽을 바라보면 시야를 가리는 게 별로 없어서 맑은 날이면 강남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건너편 외국인 학교가 있는데, 이국적인 느낌니다. 한남 정수장이 있던 자리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바뀌었네요. 한남동에 머물다보면, 서울의 중심에 있어도 서울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한국에서 보기 드문 초대형 스케일을 자랑한다.

풍경을 보는 게 슬슬 지겨워진다면, 북파크에 올라가 보세요. 여길 그냥 동네 책방으로 생각하고 들어가셨다가는, 큰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1층부터 3층 꼭대기까지 가득 채운 책장과 마주하게 됩니다. 5만여 권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마치 시대를 거슬러온 거대한 벽 같습니다. 이동진이 그의 책 <이동진 독서법>에서 부러워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가 이런 느낌일까요. 다치바다 다카시의 서재에는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 그리고 옥상까지 20만여 권의 책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기 어렵다면, 아쉬운 대로 여기 오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날씨에 대한 질문은 좋은 대화로 가는 길목이다.

한남동의 문화 명소는 하나 더 있습니다. 한남더힐과 이어지는 ‘디뮤지엄’인데요, 유엔빌리지에서도 가깝습니다. 옛날 단국대가 있을 때 이곳은 그저 평범한 대학가 뒷골목이었는데, 지금은 성격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어릴 적 숨바꼭질 하던 곳이 미술관으로 바뀐 건데, 그런 변화들이 반갑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 이곳 디뮤지엄에 들어가려면 50미터쯤 꼬불꼬불한 줄을 서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잠시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Weather: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5월초 시작해서 10월까지 한다고 하는데, 꽤 오래하네요. 제 날씨는 ‘때때로 맑음’입니다.   


#3. 글, 한남동을 이야기하며

한남동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도 좋은 장소입니다. 한남대교 옆으로 강변북로가 곧바로 이어지거든요. 자정이 살짝 지나도 넉넉하게 기다려주는 지하철 1호선도 있습니다. 금호사거리나 옥수와 이태원은 옆 동네고, 남산1호터널만 넘으면 금세 종로입니다. 한남대교를 달리면 신사나 논현까지 5분 이내 도착합니다. 일산 사는 한 친구는 막차를 타고 행신역까지 30분 조금 넘어 도착했다며 좋아합니다. 종로보다 빠르고 강남보다 친근한 동네라고 합니다.         

▲ 한남동의 밤은 어디와도 맞닿아 있다.

서울에서 교통이 편하다는 건, 그만큼 자유롭다는 뜻일 겁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무엇이든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릴 적부터 저는 어디론가 자꾸 가고 싶고, 무엇인가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렴풋 생각해낸 직업이 ‘작가’라는 거였습니다. 그림은 재주가 없고, 노래는 꽝이거든요. 연주도 못하고 영상은 만들 줄 모르니, 제가 잘하는 걸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빨간 기와집 다락방에서 오물오물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 한남동 윗동네의 옥상은 저절로 풍경이 된다.

지금 한남동은 저 노을처럼 발갛게 들끓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한 데 섞여 있습니다. 부유한 아랫마을과 달빛이 내려앉은 윗마을, 새것과 오래된 것, 동양과 서양이 용광로 안에서 부글거립니다. 외국인 아파트가 사라졌고 한남아파트는 지워졌습니다. 한남고가가 곧 철거된다고 하고, 한남역 주변의 맨션과 다세대주택도 조만간 모습을 바꾸게 될 겁니다. 저는 글 쓰는 사람, 호모 스크리베스(Homo Scribens)입니다.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이기도 하고요. 제 기억 속 한남동의 어제와 눈 앞의 지금을 모두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소설 <한남동 원주민>을 쓰고 싶은 건 그 때문입니다. 제 바람대로 이야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벌써 세 달이 되어 갑니다. 7월입니다. 유료독자 열여덟 분 고맙습니다. 더 많은 혜택을 드리려고 고민중입니다. 반대로 7월호 구독료를 입금하지 않으신 분들께선 더 이상 생각 없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더 말씀 드리기 민망하거든요. 응원 고마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05-2766818)    


2. 여름휴가 계획은 잡으셨는지요? 혹시 서울에 계신다면 한남동에 들러보세요. 한남동에서 제 글을 다시 읽어보시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분명 있습니다.   

  

3. 여기 올리는 글이 곧 <한남동 원주민>의 소재가 됩니다. 이것들을 잘 엮어내고 사람을 더 살려내고 이야기를 담아내 보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유료 독자분들께 제일 먼저 전해드릴 거고요. 물론 한 분씩 찾아뵐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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