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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Aug 08. 2018

이태원의 밤 호객꾼들

<週刊 태이리> 제15호

재난 수준의 폭염입니다. 지난 주 에어컨 틀고 잤더니 코가 좀 맹맹했습니다. 오후부터 머리가 띵하더니 바로 으슬으슬하더라고요. 이마에 땀이 맺혀야 한대서, 꽁꽁 싸매고 낑낑 누웠습니다. 현기증만 나서 선풍기 살짝 틀었는데, 이번엔 냉기가 몸에 닿으면서 뼈가 막 쑤셨어요.  벗기를 수십번 반복하다보니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러 내렸습니다. 맹구 캐릭터가 된 기분 낄낄대다가 ‘아, 이런 시트콤 같은 장면이 몇 번 더 있었는데?’라는 데자뷰가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약 25년 전 중학생 때로 돌아갑니다. 장소는 한남동 옆 이태원이고요.


#1. 가죽팬티는 정말로 있다

그 사건은 35도를 훌쩍 넘는 한여름 밤 가죽 장갑을 샀던 일입니다. 안 살 수 없었어요. 겁이 났거든요. 중학생 때 야근 마치고 퇴근하면서 가끔씩 이태원에 들러 집에 왔습니다. 아참, 야근 아니라 ‘야자요. 퇴근 아니라 ‘하굣길’이고요. 이태원 시장은 90년대만 해도 멋 좀 내는 패션피플의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제가 멋쟁이는 아니지만, 그 때가 한창 옷에 관심 많을 나이잖아요. 여기 가면 해외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거의 다 찾을 수 고, 진품과 구분하기 힘든 S급 모조품을 싸게 살 수 있었어요. 질 좋은 온갖 보세 상품도 가득 쌓여 있었고요. 안 사도 그걸 보는 게 그냥 재밌었습니다.

▲ 이태원시장은 해밀턴호텔부터 녹사평까지 이어진다.

호객꾼이라고 하죠. 이태원 삐끼들에게 깐죽댄 게 화근이었습니다. “동생들 뭐 찾아요? 수영복? 반바지? 없는 거 없어요.” 장난기가 발동했죠. “다 있어요?” “그럼요, 찾으시는 건 다 구해드려요. 완전 진짜 같은 가짜 있어요. 오산학교 다니지? 형이 싸게 해줄게.” “정말 다 있어요?” “그럼, 아직 매장에 안 나온 것도 있어. 나이키, 빈폴, 게스 신상 나왔는데 한 번 볼래?” “혹시 밍크코트 있어요? 그거 사러 왔는데. 아니면 가죽팬티 있어요? 큭큭. 이왕이면 호랑이 가죽이 더 좋은데! 그런 건 없죠? 에이 아쉽다.” 표정이 싹 변하더라고요. 방금 전까지 교회 형처럼 친절하게 웃던 삐끼가 헤드락을 걸더니 귀에 속삭였어요. 벌, 너 따라와!” 새됐다. 자길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그 형은 투우장의 소처럼 씩씩대기만 했어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삭막한 시대 배경이 이때부터 10년 전쯤인데, 90년대에도 비슷했어요. 삐끼라는 게 학교 일진이나 동네 양아치들의 단기 알바 자리였거든요. 이 분도 그러신 걸 제가 몰라뵙고 그만.

▲ 이태원시장은 빅토리타운과 그 뒷골목이 가장 붐빈다.

의리 없는 친구는 잽싸게 튀었고 저만 붙잡혀서 녹사평역 2번 출구 앞 빅토리타운 뒷골목으로 100여 걸음 끌려갔습니다. 적진에 붙잡혀 온 민간인 포로 같은 기분이었어요. 평소 눈 감고도 가던 길인데, 땀과 눈물이 앞을 가려서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동굴 같은 곳을 지나 어떤 음침한 가게 앞까지 붙들려 갔어요. 그 형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닫혀 있던 셔터를 촤르륵 밀어 올리더라고요. “이 새끼야 똑똑히 봐! 있어? 없어?” 있었어요. 많이 있었습니다. 눈앞엔 가죽잠바, 가죽바지, 가죽부츠는 물론이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못 입을 것 같은 가죽팬티도 ‘정말로’ 있었어요. “자, 손님 하나 골라보시죠. 안 사면 여기서 죽을 줄 아시고요!”


#2. 나한테 장난치고 감당할 수 있겠어?

귀가 징징 울리고 머리가 바늘처럼 따가웠어요. 어떻게든 빨리 빠져 나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그 자리에서 싹싹 빌었어요. “형, 제가 학생인데 어떻게 저걸 사요. 정말 돈이 없어서 그래요. 이번만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다신 안 그럴게요. 형님, 아니 오산학교 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그 형이 “야, 니가 아직 모르나본데 사실은 나 용산고 나왔어! 선배라고 부르 마!”라며 말도 싹 바꾸더라고요. 젠장, 삐끼가 학교 어딜 나왔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야 꼬마야, 너도 설마설마 했을 거다. 가죽 팬티가 정말 있을 줄은 몰랐겠지. 이 새파랗게 어린 게, 땀 뻘뻘 흘리며 맘 잡고 사는 형님들한테 장난을 쳐? 날이 덥다보니 뒤지려고 환장한 거야? 그런 거야? 응?”  

▲ 그 삐끼 형님들의 인상착의가 대충 이랬다.

말이 점점 더 험악해졌어요. 글로 쓸 수 없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았어요.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에 쇠사슬을 바지에 단 형님들이 어디선가 구경을 나왔고, 성별을 알 수 없는 분들이 주변에 모여들더니 “너 귀엽다” 이러면서 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거든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울먹이면서 빈 주머니를 까뒤집는 퍼포먼스까지 했습니다. 회수권과 토큰 몇 개가 처량하게 바닥에 떨어졌죠. 아참, 혹시 회수권과 토큰이란 말을 처음 들으신 건가요. 교통요금을 티켓으로 결제하는 건데, 학생에게만 싸게 파는 거예요. 학교 주변이나 학원 밀집 상가에서는 상품권처럼 은밀히 유통되기도 했죠. 암거래도 있었고, 회수권 깡도 해줬어요.

▲ 가난한 학생들에겐 이게 일종의 유가증권이었다.

“야, 야,  얘 이러다 오줌 싸겠다. 재수 없으니까 그냥 보! 꺼져!” 꺼지라는 그 말이 얼마나 고맙게 들리던지요. 정말로 ‘강 같은 평화’가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어이, 그냥 보내긴 뭐하고, 뭐 작은 거 하나라도 팔아서 보내. 이제 막 오늘 장사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헛발 치면 하루 종일 개판된다고!”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고 싶었어요. “형님, 제가 무스탕이나 가죽잠바 살 돈은 없고요, 가죽 팬티는 사도 못 입잖아요. 죄송하지만, 혹시 면양말이나 손수건 그런 거 없을까요?” “야, 여기 가죽 제품 전문점이야.” “그러시면 저기 가죽 장갑은 얼마예요?”

 

#3. 쪽팔려도 괜찮아, 쓸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싸 보였는데도 7만원쯤 했던 거 같습니다. 저에겐 몇 달치 용돈이고, 패미콤이라는 오락기 산다고 조금씩 모았던 큰돈이었습니다. 꽁쳐둔 돈,  회수권과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몽땅 드렸어요. 짝퉁 티가 펄펄 나는 여자용 구찌 가죽장갑을 사고나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야, 형이 착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그리고 이번 겨울 꽤 춥다고 하던데 이 장갑 끼면 따뜻할 거야. 지금은 조금 비싼 것 같아도 그때 되면 정말 좋은 거 싸게 잘 샀다며 나한테 고마워 할 거라니까!” “이건 여자 장갑인데요” 볼멘소리를 하자 버럭 화를 냅니다. “너 엄마 안 계셔? 누나 없어? 나중에 여자 친구 생기면 주든가! 이게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해? 맘에 안 들면 형이랑 내려가서 다시 골라볼까?” “아뇨, 이거 누나가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그래, 어려서 아직 모르나 본대 여자들은 이런 거 엄청 좋아한다고!”   

▲ 다양한 색과 디자인의 가죽제품이 즐비했다.

속으로 쌍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삐끼가 저를 불러 세웁니다. “야, 너 아까부터 표정이 그게 뭐야. 너 때문에 내가 삥 뜯은 것 같잖아. 참내, 그런 거냐? 지금 내가 코묻은 돈 뺏은 거야?” 잘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물어보는 잔인한 놈입니다. “아뇨, 가죽장갑 정말 사고 싶었어요.” “그래, 그렇게 살아야 돼. 눈치도 보고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그래야 사회에서 성공한다니까! 내가 좀 살아보니 사는 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들어!” 성공하든지 말든지 제가 다 알아서 할 건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보다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면 훈계를 막 하고 싶어지는 건가.    

▲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친구처럼 도망치지 그랬어. 죽기야 하겠어? 까짓 거 한 번 대들어 보든가. 아니면 경찰에 바로 신고하든지.” 아휴, 모르는 소리 말아요. 중학교 1학년 때 제 키가 130cm를 조금 넘겼고 작았어요. 눈도 나빠지기 시작해서 두꺼운 안경까지 썼다고요. 섣불리 뛰다가는 금방 잡힐 게 뻔했습니다. 쳐맞기 직전이고요. 오래된 일이라 이젠 웃으며 말하지만, 그땐 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벌벌 떠는 사냥감이었. 낄낄대다가 친구들이 제게 또 물어봅니다. “넌 그런 이야기를 왜 여기저기 막 하고 다니는 거냐. 지지리 궁상이고 쪽팔릴 게 뻔한데.” 이렇게 대답하죠. “하면 안 돼?재밌잖아.” 원래 글이란 게 빨가벗고 길거리에 나서는 겁니다. 글 쓸 때 정말 쪽팔린  찌질한 걸 고백하는 게 아니라 있어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고요. 아, 소설은 좀 지어내야 하지만 그것도 있을 법하게 지어내야 읽어줄 만 합니다. 글 쓸 때  창피한 거, 그딴 거 없습니다. 작가로 살면서 정말 창피하고 슬픈 거는, 아무 것도 못 쓰는 거 하나 뿐입니다.


▮ 덧붙이는 말 ▮ 

1. 아직도 한남동 쓸 게 더 남았냐고 합니다. 세월이 얼만데. 오히려 이야기는 차고 넘칩니다. 뭘 어떻게 이야기할지 살펴보는 거, 쓰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렵습니다. 이태원, 금호동, 옥수동, 서빙고, 반포, 강남까지 무대를 넓혀 갈 생각입니다.

 

2. 요새 유튜브로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찾아 봤는데, 이거 정말 명작이라고요. 소소한 에피소드가 두 개 겹쳐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완결된 이야기예요. 캐릭터의 심리묘사는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즘입니다. 시트콤의 재미는 일상에서 발견한 찌질함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 쓰고 싶어요.

    

3. 요새 정말 덥죠? 이럴 땐 북캉스가 최고입니다. 저의 책 <바이시클 다이어리> <서른살, 회사를 말하다> <홍보인의 사생활>도 살짝 껴서 읽어봐주세요. 서평 올리시면 찾아서 바로 댓글 달아요.   

 

4. ‘보세’ 상품이 뭐냐고 물으실 것 같아서요. 생산자를 밝히지 않고 파는 옷이에요. 품질기준에 못 미치거나, 어떤 이유로든 관세를 통과하지 못한 것들을 따로 모아서 뒤로 파는 거죠. 인터넷 뒤져보니 보세는 원래 보류관세(保留關稅)의 줄임말이라고 하네요. 수출하지 못하고 묶여있는 제품을 ‘보세’라고 하고요. 쉽게 말해 보세옷은 메이커, 요샛말로 브랜드 떼고 몰래 파는 A급인 듯 B급인 제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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