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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Aug 15. 2018

일상이 지겨울수록 더 써라

<週刊 태이리> 제16호

‘직장인의 삶’이란 게 원래 다 그 모양입니다. 회식과 야근이 일상이고, 매일 바쁘게 움직여도 뭘 했는지 잘 모릅니다. 칠흙처럼 퍽퍽한 삶을 관성처럼 이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불쑥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힘내세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내일도 똑같을 겁니다. 절벽같은 그 현실을 뛰어넘고 싶을 때, 저는 글을 씁니다. 회사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제가 지금부터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 건데요, 글을 다 읽고나서 한 분이라도 뭔가 쓰고 싶어진다면 참 좋겠습니다.


#1. 월터,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벤 스틸러)는 노총각 샌님입니다. 짝사랑하는 여직원에게 말 한 마디 못 걸고, 마감을 맞추느라 좁은 암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납니다. 꼰대 상사가 얄미운 표정으로 조롱을 해도 대들어볼 생각조차 못합니다. 주눅 든 채로 매거진 <LIFE> 잡지에 실릴 사진을 묵묵히 현상할 뿐입니다. 그는 마흔이 넘도록 회사를 자신의 삶(LIFE) 그 자체로 믿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생존은 숭고한 일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김훈 선생께서 말씀 한 ‘밥벌이의 지겨움’이 이런 걸까요.

▲ 한 가지 생각에 빠져들면 그 자리에 멈춰선다.

그에게도 잘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멍 때리기’입니다. ‘내가 만약 고백을 한다면’ ‘꿈을 찾아 떠났더라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는 겁니다. 아마 <LIFE> 잡지가 폐간되고 마지막 호를 장식할 25번 필름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영양가 없는 상상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됐을 겁니다. 월터는 이번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린란드 어딘가 있을 사진작가 ‘숀’을 찾아 떠밀리듯 여행길에 나섭니다. 숀은 자유와 대자연을 매일 만지며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월터가 꿈꾸던 삶이 바로 그런 거였습니다.

▲ 월터는 숀을 점점 닮아가며,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월터는 상상만 하던 걸 그냥 해버립니다. 처음엔 겁이 났습니다. 누구라도 술주정뱅이가 운전하는 헬기에 타고 싶진 않을 겁니다. 바다 한 복판으로 뛰어들고, 상어를 아슬아슬 피하고, 폭발 직전의 화산과 마주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어릴 적 맛본 자유를 다시 느끼고, 눈 덮인 하얀 산에 올라 ‘유령’이라 불리는 눈표범과도 만납니다. 자포자기하며 무작정 떠난 단 한 번의 여행에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생애 최고의 순간과 마주한 겁니다. 이제 그의 삶은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했더라면’을 지우고 그 자리에 ‘일단 해보자’를 적어 뒀거든요.


#2. 패터슨, 일상은 시가 된다

 주인공이 사는 도시 이름이 ‘패터슨’인데 주인공 이름도 ‘패터슨’입니다. ‘한남동’ 사는 ‘한남동 씨’ 같은 거죠. 이름부터 무성의한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루틴(Routine)이 뭔지 제대로 알려줍니다. 알람도 없는 낡은 손목시계를 보며 아침 6시 15분에 정확히 일어나고, 시리얼에 우유를 딱 그만큼 말아먹고, 같은 길로 출근하고, 하루 종일 마을버스를 운전하고, 아내가 챙겨준 점심을 먹고, 퇴근해 애완견과 같은 길로 산책을 하다, 바에 들러 어제 마셨던 그 맥주를 딱 한 잔 합니다. 짐 자무쉬 감독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무런 기승전결 없는 이 지겨운 패턴을 꿋꿋하게 보여줍니다.

▲ 바뀌는 게 있다면, 일어나는 자세 정도다.

러닝타임을 지켜보는 게 고문일 지경인데, 정작 패터슨은 별로 안 지루한 모양입니다. 미소로 흥얼거리며 시(詩, POEM)를 적어 내려갈 뿐인데, 다루는 내용은 평범합니다. 성냥갑, 공책에 그어진 선, 빗방울, 그리고 아내입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손님들의 시시콜콜한 대화, 마을에 새로 생긴 가게, 아내가 만드는 컵케이크, 심지어는 커튼의 동그라미 무늬의 변화에도 관심을 줍니다. “일상은 지루한 게 아니라, 온통 쓸 것 투성이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슬픔, 지루함, 찌질, 궁상, 즐겁고 우울한 모든 것들이 다 시의 소재가 됩니다.

▲  일상은 비밀노트에 빼곡히 담겨 시가 된다.

이 지루한 영화에도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주에 비밀노트를 출판사에 가져가 책으로 낼 생각이었는데, 애완견이 그걸 갈기갈기 찢어버린 겁니다. 화를 낼만도 한데, 이 지루한 놈은 그저 폭포를 하염없이 지켜보는 걸로 상실감을 혼자 달랩니다. 거기서 일본인 시인을 우연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세상은 보잘 것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건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졸다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맞아요, 일상과 예술은 거기서 갈라집니다. 위대한 노래와 소설, 영화와 드라마도 쪼개보면 원래는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그저그런 일상이었습니다. 거기서 반짝이는 이야기를 먼저 발견하고, 그걸 나만의 언어(말과 글, 영상, 이미지, 몸짓, 소리)로 바꿔내면 삶은 예술이 됩니다. 마치 이걸 알기 위해 120분 넘게 달려온 기분입니다. 시간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3. 변산, 슬픔은 노래가 된다

학수(박정민)는 홍대에서 발렛파킹 알바를 하며 어렵게 삽니다. 그의 꿈은 에미넴이나 도끼처럼 유명한 래퍼가 되는 겁니다. 고시원에서 가사를 쓰면서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6년 연속 참가했지만, 매번 떨어집니다. 상위 대회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경연에서 매번 ‘어머니’나 ‘아버지’와 같은 내용이 프리스타일 랩으로 올라오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그 단어만 마주하면 라임(Rhyme)은커녕 리듬(Rhythm)을 따라가기도 어렵습니다. 이번에도 탈락입니다.

▲ 시를 쓰듯 랩 가사를 비밀노트에 써내려간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동창 선미(김고은)의 거짓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학수는 절대로 고향 변산에 내려가지 않았을 겁니다. 거기엔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깡패 아버지, 그리고 실패한 첫사랑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며, 지금 학수는 거기서 탈출하려고 이 난리를 치며 랩을 부르고 있는 겁니다. 징그러운 가난이, 애끓는 슬픔이, 부끄러운 흑역사가 매번 발목을 잡습니다. 막상 내려가 보니 아버지가 너무 팔팔해 화가 날 지경입니다. “그냥 뒈지시든가, 해준 게 뭐 있다고 이제와서 왜 그래?” 학수는 마음 속 싸매 둔 분노 아버지에게 랩처럼 쏘아 붙입니다.

▲ 그는 매번 어머니라는 단어 앞에서 막힌다.

래퍼 학수는 시인을 꿈꾸던 아이였습니다.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라고 노래하는 작은 수첩을 갖고 있었어요. 패터슨의 비밀노트처럼요. 학수는 일상을 랩의 가사로 바꾸는데, 화면에 그 노랫말이 꽃비처럼 툭툭 떨어져 내립니다. 영화 <패터슨>에서 시(詩)를 쓰던 패터슨의 모습과 절묘하게 겹칩니다. 눈여겨 볼 장면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다음에 있습니다. 일곱 번째 경연에서 학수가 어머니를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슬프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번에는 어떤 성과를 거둘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 여행하듯 살면, 모든 게 다 새롭고 궁금하다.

이 세 남자의 공통점은, 일상을 ‘여행’처럼 바라보게 됐다는 점입니다. 월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했고, 패터슨은 주변을 더 따뜻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됐고, 학수는 아픔을 더 이상 숨기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일단 뛰어들고, 평범한 것에 애정을 쏟고, 발가벗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직장인의 삶’에도 의미라는 게 담기게 됩니다. 그걸 끝까지 밀고가면 지겨운 직장생활도 분명 조금씩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존재를 한 줄 남기고 싶다면 “지루하다”라는 그 말이라도 지금 당장 브런치에 써 보시면 좋겠습니다. 시인 이상(李箱)은 소설 <권태(倦怠)>에서 “지겹다”는 비명을 질렀고, 그게 명작이 됐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런 게 다 예술이 됩니다.


▮ 덧붙이는 말 ▮


1. 노트북이 고장나 한 글자씩 폰으로 적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깎는 고승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저절로 상상하게 됩니다. 편집이 다소 어설프게 된 것은 내일(8.16) 오전 중 고쳐놓겠습니다. (8월 16일 오전에 편집을 수정했습니다. PC로 쓰는 건 참 편하고 좋네요.)


2. 저는 어제 영화 <마녀>를 봤는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워너브라더스사가 투자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어벤저스 한국 시리즈가 되길 기대합니다. 순수와 도발을 넘나드는 김다미의 연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팬이 될 것 같습니다.


3. 마감을 못 지킬까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늦게 글 올려 미안합니다. 생각못한 일들이 생기네요. 쓸 수 있을 때 미리  많이 써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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