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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Aug 22. 2018

한남동과 내 아버지

<週刊 태이리> 제17호

아버지는 ‘이발사’입니다. 평생 남의 머리를 다듬고 수염을 깎았습니다. 제 기억은 1980년 이태원과 한남동이 맞닿는 우사단로 어딘가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커다랗고 검은 이발소용 의자 두 개를 차려 놓고 작은 가게를 하시다가 어느 날 도깨비시장 끝으로 떠밀리듯 옮겼습니다. 삼남매 키우기가 버거우셨는 한숨 내쉬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셨습니다. 그게 왠지 막내인 제 탓인 것만 같아, 아버지가 술이라도 드시고 오면 다락방에 몰래 숨습니다. ‘나만 없었어도 형편이 좀 나았을 텐데’ 감수성 예민한 열 살 꼬마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슬픔이 지나가길 숨죽여 기다리며 <소공녀>나 <80일간의 세계일주>같은 낡은 동화책을 넘기는 것뿐입니다. ‘진짜 아빠는 부자일거야, 언젠가 만나게 되면 나도 저 멀리 맘껏 나가봐야지!’라고 내맘대로 생각하면서요.


#1. 치유의 글쓰기, 너는 콤플렉스

가난을 추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는 아니지만,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이제 겨우 아문 상처에 굵은 소금을 문지르는 가학적인 일인지도 모릅니다. 80년대에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모두가 힘들었는데, 자기 혼자만 유별나게 다는 날선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까지 내다 파는’ 관심종자로 비춰질까 봐 걱정도 됩니다. 별로 득 될 게 없어 보이는데도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 해묵은 콤플렉스를 걷어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상대적이지만, 저는 커가는 내내 돈에 대한 결핍과 불안을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 왔습니다. 교복, 급식비, 참고서, 등록금, 결혼, 전세금까지 모두요. 마흔이 다 된 지금도 그 굴레는 여전하지만, 마음 속에서부터 그걸 떨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 상처를 내보이려면, 제법 큰 용기가 필요하다.

“글쓰기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는 것이다” 제가 주문처럼 외운 말입니다. 술자리, 세미나, 강연, 그리고 브런치에서 하도 여러 번 말해서 제 혀끝에 묻어 있을 정돕니다. 남들에겐 “용기를 내야 쓸 수 있다!”고 말하더니, 이제와 벌벌 떠는 제 모습이 우습고 민망합니다. 영화 <변산>의 주인공 학수(박정민)가 <쇼미더머니> 랩배틀에 여섯 번 올라도 ‘어머니’라는 단어 앞에서 매번 쩔쩔맨 것과 닮았습니다. 인생의 맨 뒷장까지 꽁꽁 숨겨 뒀다가 저절로 사라지길 바라는 구질구질하고 힘든 기억이지만, 그때의 생각과 감정은 그르렁거리는 가래처럼 머릿속에 끈적거립니다. 오랫동안 힘들게 감춰온 그걸,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글자를 두드리던 좀 전까지도요.    

▲ 새벽 버스에선 부지런함이 아니라, 가난의 냄새가 난다.

“새벽 5시에 버스를 타보면요,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말 그거 진짜 다 개소리거든요?” 영화 <싱글라이더>의 대사 중 하나인데, 아마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이 딱 이랬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에 첫 차를 탔습니다. 형이 고등학생이고, 누나와 제가 중학생이던 90년대 초반에 아버지는 종로5가 보령약국 뒷골목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는데, 여기서는 꽤 오래 있었습니다. 출근하시려면 보광동으로 건너가든지, 단국대까지 10여 분 걸어내려가 첫차를 타야 했죠. 열대야로 잠을 설친 8월에도, 칼바람이 살을 찢는 1월에도 아버지는 똑같았어요. 매일 새벽 5시, 그리고 첫 차. 아버지란 존재는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젊음을 갉아먹으며 한남동에서 불만투성이 막내로 자랐습니다.


#2. 미친개는 아직 거기 있을까

영화 <친구>의 명대사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가 제 인생에서도 한 번 있었습니다. 어디나 있던 ‘미친개’라고 불리는 체육 선생이 오산학교에도 있었는데, 학생들 앞머리가 손가락 두 마디보다 길어지면 어김없이 바리깡을 들이밀며 으름장을 놨습니다. “아버지도 아시냐,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이 말이 가장 듣기 싫었는데, 그 안에는 ‘자식새끼가 모양인데 아버지란 놈은 뭐하느라 신경도 안 쓰냐?’는 비아냥이 교묘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장군이거나, 기자거나, 장학사거나 공무원이거나 서울대 교수라면 묻지 않았을 거면서. 그때 전 답답한 마음에 괜히 이런 원망만 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쟤네처럼 멋진 일을 하지 못할까? 왜 그 흔한 용돈 한 번 주지 못할까? 아버지는 왜 그 흔한 나이키를 못 사주실까?’ 죄송해요, 아버지. 버럭 화를 내시는 그 모습을 참 미워했어요.

▲ 그들은 꼭 이런 모습으로 아버지 직업을 물었다.

운동장 옆에는 영선반(營繕班)이라고 잡다한 목자재와 책걸상이 널브러진 곳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쪽 구석에 구내이발소가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는 “학생, 어떤 스타일로 하고 싶어요?”라고 절대 묻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무조건 삭발을 합니다. 한 명에 고작 5분도 안 걸립니다. 항의할 수도 없고요. 여기서 자르면  머릿속을 서걱거리며 걷는 쎄한 느낌이 한참 드는데, 저는 그게 정말 싫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제 스타일을 묻지 않으시는 건 똑같았자민, 면도까지 쓱쓱 시원하게 해주시는 건 달랐습니다. 저는 식민지 내무반처럼 생긴 그 이발소에 들어가기 싫어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집에서 자르고 올 테니, 하루만 시간을 더 주세요!” 한 푼도 아까운데 돈 주고 자르면 가난한 제 매를 드실 게 뻔합니다.

▲ 아버지 가게에도 딱 이런 개수대가 있었다.

“짜아악!” 귀가 윙윙 울리고 볼이 얼얼했습니다. 개긴다며, 제 뺨을 후려친 겁니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황당해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이게 무슨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도 아니고, 웬 학교 폭력인지. 친구들이 “쟤네 집, 이발소 해요!”라고 편 들어주지 않았다면 따져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뭐? 이발사 아버지가 머리 자르지 말라고 하시든? 이발사 아버지는 선생님을 그렇게 노려봐도 된다고 가르치시든?” 아니 자기가 사과를 해야지 왜 화를 내는 거야. 앞뒤 사정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주먹부터 쓰는 이딴 게 선생이라니.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건 화를 삭이며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뿐이었어요. 이게 제가 아직도 선생을 존경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 양아치는 선생이랍시고 결국 아무 변명조차 하지 않았어요. 학생들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왜 툭하면 아버지 직업을 조롱하듯 묻는 건지. 그 미친개는 미친개답게 침을 질질 흘리며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여기저기 묻고 다녔습니다.


#3. 빨간 기와집 탄생의 비밀

나중에 그 이야기가 아버지 귀에 우연히 들어갔습니다. 화를 내거나 혼 내실 줄 알았는데 덤덤하시더라고요. “너, 나중에 커서 사(士, 師)’짜가 들어가는 직업을 꼭 가져라!”고 짧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거죠. 저는 그 말이 참 나쁘게 들렸습니다. 출세하지 못하면 억울해도 참아야 한다는 소리니까요. 당신께서 가장 듣기 싫었던 게 어쩌면 이 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더 좋은 직업을 가져서 아들딸은 억울할 일이 없었으면 하신 거겠지요. 아버지는 속상한 마음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할 줄밖에 몰랐던 겁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래 오셨던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 이발사도 ‘사’짜 직업이란 거 아세요? 덕분에 제가 이만큼 잘 자랐잖아요. 그냥 그 선생이 정말 나쁜 새끼였던 거예요. 이젠 분명히 알아요, 제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고민이 많지만, 이젠 어떻게든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아버지 , 정말 고생많으셨어요. 이제는 몸까지 불편해진 칠순 너머의 아버지를 보면, 제가 자란 한남동이 슬퍼지고 아련해지고 미워집니다.

▲ 어수선한 이발소 모습을 보면 왠지 아련하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문득 내 아비가 궁금해졌습니다. ‘왜, 어떻게’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신 걸까. 훗날 문학 선생이 내준 ‘아버지 자서전 쓰기’라는 과제를 핑계로 몇 마디 물었습니다. 공부를 꽤 잘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더 배울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땐 다들 그랬으니 괜찮다며 쓰디쓴 표정으로 웃습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가 작아니다. 아버지가 20대였던 1960년 직업군인은 꽤 괜찮은 일자리라 부사관 지원을 고민했지만, 막상 하려니 견디기 힘들었다고 하세요. 제대 후 낯선 서울에서 자본 없이 돈을 벌려면 ‘기술’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손재주가 좋아 시작해 본 게 평생 직업이 되었던 겁니다. 그때는 적성검사나 취업코칭이란 게 없었습니다. 당장 먹는 게 중요했던 시대였어요. 아버지에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 민들레 씨앗처럼 한남동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한남동에 뿌리 내린 것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상경해 용산역에 내렸고, 기차역과 국철 주변에서 지내다가 70년대 초에 남산 아래 산동네로 흘러든 거죠. ‘강남’이란 이름도 아직 없던 그때, 신사동이나 압구정에 자리잡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저 ‘배산임수’ 지형이 좋아보이셨다고 합니다. 한남동 윗동네에서 시작하지만, 아랫동네로 금방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30년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한남동 방 한 칸 월세로 시작해 10여 년의 세월동안 전세금까지는 겨우 마련했지만, 집 구하기는 역부족이었다고 하세요. 지금도 서울집은 너무 비싸 엄두가 잘 안나는데 그럴 만 하죠. 그때 아버지가 결심한 게 80년대 붐이었던 중동 건설 현장에 가는 거였고, 그 뜨겁고 낯선 곳에 떠밀어 보낸 돈으로 우리 가족은 난생처음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한 마디로 한남동 빨간 기왓집은 아버지 ‘삶의 전부’였고 ‘인생과 맞바꾼 전 재산’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한남동, 그 낡은 집 한 채에 그렇게나 많은 사연이 눈물처럼 송골송골 맺혀 있습니다. 당신이 살던 옛 고향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 덧붙이는 말 ▮ 

1. [알립니다] 무료로 글을 읽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단, 유료 독자분께는 ① 1:1 카톡메시지 ② 대필 서비스(3개월 이상) ③ 사은품(구독 기간별 상이) ④ 반기별 호프데이 초청(6개월 이상) ⑤ 책 출간 시 사인본 증정 ⑥ 매월 글쓰기 강의자료 제공 ⑦ 오프라인 강연 할인 등의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월 9,900원 / 카카오뱅크 3333-0527-66818)


2. 한남동은 서울의 여러 동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나치게 큰 의미를 구겨 넣고 무리하게 이것저것 끌어다 놓으면 그릇이 넘치게 됩니다. ‘한남동’ 그리고 ‘그 한남동의 나’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하면 ‘서울’ 그리고 ‘80년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역사’까지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다행히도 몇 가지 사례들을 찾아가며 자료를 모았습니다. 계절이 바뀌듯 성실하게 소설 <한남동 원주민>의 모양새를 만들고 있습니다.    


3. 한남동에 대한 여러 자료, 에피소드, 80년대 사건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댓글로 남겨주시면 소중하게 읽고 이야기 속에 녹여내겠습니다.     


4. 소설 <한남동 원주민>를 쓰려면 아버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젠 아버지께서 은퇴하셔서 그럴 듯한 이발소 하나 내드리겠다던 어릴 적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5. 유료 독자 분들 중 8월호 입금하신 ‘김지현’이라는 분이 계시면 저에게 연락처나 카카오톡 아이디를 꼭 알려 주세요. 제 카카오톡 ID는 story40입니다. 이메일은 life1102@naver.com 입니다. QR코드도 남깁니다. 참 고맙습니다, 김지현 님.    

찍으면 카톡 연결 될 겁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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