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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Sep 19. 2018

이재용이 한남동 사는 이유

<週刊 태이리> 제21호

어릴 적 친구들과 건너던 한남대교를 어른이 되어 다시 넘습니다. 한때는 ‘제3한강교’라고 불렸을 이곳에 서면 한광교회에서 이슬람성당으로 이어지는 한남동의 능선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거든요. 나의 친애하는 ‘한남동’이 조금씩 어둠에 잠기면, 저 멀리 꼭대기에서부터 빨갛고 파란 불빛이 차례차례 켜집니다. 어디선가 밥 짓는 냄새가 날 것 같은 생각을 하다가, 한남동 이야기가 벌써 열편 째는 데 깜짝 놀랍니다. 어쩌면 ‘한남동’은 핑계고, 그 위에 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 선(線), 아무나 넘지 못하는

한남동은 늘 긴장감 있게 저를 끌어당깁니다. 가난과 풍요로움, 젊음과 나이듦, 옛 것과 이국적인 것을 보란 듯 한 번에 내 놓거든요. 여기에는 한남초와 오산학교에 깃든 색바랜 추억이 있고, 제 탄생과 가난의 근원인 아버지가 형님과 살고 계십니다. 누나는 집을 따로 구해 남산과 서울타워를 창문에 그림처럼 걸어 놓고 지내고요. 거기서 홍차 한 잔을 마시며 노을빛에 바라보는 한남동의 실루엣은 시간을 잠시 잊을 정도로 꽤 매력적입니다.

▲ 한남동의 밤은 검고 깊으면서도, 소박하고 차분하다.

한남동을 사람에 빗대면 ‘소꿉친구 짝사랑’ 같습니다. 오랜 시간 같이 놀고 자랐지만 저는 그녀가 정말로 뭘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대놓고 밀어내지는 않지만 ‘딱 여기까지야’라고 선을 긋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런 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몇 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꽤 가깝게 다가갔다 싶지만, 아무리 불러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 동굴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에겐 그 속마음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한남동이 딱 그래요. 사귄 적도 없는데, 헤어진 연인처럼 우아하게 거리를 둡니다. 다가갈 수가 없네요.

▲ 이태원역 남측과 옛 단국대 건너편에 대저택이 몰려 있다.

누군가는 속을 알 수 없다며 싫어하겠지만, 저는 좀 다릅니다. ‘손바닥처럼 속이 들여다보이면 얼마나 심심할까’라는 생각을 요. 한남동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 번도 그 중심에 발을 딛지 못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이라 그리움이 더 큰가 봅니다. 그녀의 방에 초대받지 못하고, 선을 넘지 못하고, 수줍은 고백도 못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상상만 하는 게 전부입니다. 오랫동안 옆에 있었지만 알지 못하는, 이러니 더 궁금하고 계속 사랑할 수밖에.


#2. 교통(交通), 어디와도 맞닿는

빈부격차 한복판에선 자란 저는, 어릴 때 궁상맞은 악(惡)취미가 있었습니다. 각국 외교관과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모여 사는 저택 주변을 내 집 앞에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산책하는 겁니다. 뭔가 기운을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고, 막연한 질투와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땐 순천향병원 건너편이었는데, 오산학교를 다닐 땐 하얏트호텔 뒤편과 크라운 호텔 쪽으로 반경을 넓혔습니다. 리움박물관으로 올라가 삼성가(家)들이 모여 산다는 집들을 담 너머로 슬쩍슬쩍 보곤 했습니다. 닿지 못한 담 너머의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거든요. ‘쟤들은 나보다 뭐가 잘 나서 저 안에 사는 거지?’ 이런 생각 투성이었죠.

▲ 종로, 광화문, 신촌, 강남, 상암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커서는 좀 다른 게 궁금했습니다. 삼성 이재용 같은 재벌들은 하필이면 왜 이곳 한남동에 모여 살까, 하는 거요. 가장 먼저 생각난 건 ‘편리한 교통’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남동에서 남산 소월길을 따라 달리면 서울의 중심이자 본사가 위치한 광화문과 시청에 15분이면 도착합니다. 한남대교만 넘으면 바로 강남이고,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와도 가깝습니다. 한남동오거리 버스정류장에는 20여 대의 노선이 어지럽게 지나갑니다. 머리가 따가울 정도입니다.

▲ 한남오거리에선 약수, 옥수, 장충, 이태원, 신사가 스친다.

일부러 좀 바보 같은 질문도 해봅니다. 지하철 가까운 아파트가 아니고 왜 산 중턱에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거냐고. 왜긴요, 삼성, SK, 두산, 현대의 재벌 2, 3세들이 시끄럽게 모여 살거나 쪽팔리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나 영혼까지 대출 받아서 아파트 사는 거지, 거주 공간으로만 치면 아파트는 개성은 하나도 없고 실용과 투기만 남은 묘한 건축물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아파트에 살고 있죠. 아파트 공화국인 이곳 한국에선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만.


#3. 배산임수(背山臨水), 돈과 사람 모인

교통 편한 것만 치자면 종로 펜트하우스도 방법일 텐데, 10대 기업 재벌 총수들은 왜 하필 한남동을 선택했을까요. 산 중턱에 가고 싶으면 전통 부촌인 성북동이나 평창동도 괜찮을 텐데. 그 이유는 풍수지리학에 찾았는데, 한강과 남산이라는 ‘배산임수’의 자연환경 때문일 거라고 합니다. 한남동이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모양이어서 재물이 모이고 좋은 후손을 볼 수 있다고 해요. 아마 남부러울 것 없는 그들도 미래가 궁금하고 불안했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매일이 치열했던 한남동 산동네와 비가 오면 바닥이 잠겼던 아랫동네에서는 지금 당장이 걱정되었지만요.

▲ 아마도 이런 걸 집 앞에서 하는 게 싫었을 거다.

제가 찾아본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는 여기에 집을 지어야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무형의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도를 살펴보면 한남1동 블루스퀘어 건너편엔 스페인, 이탈리아, 케냐, 코트디부아르, 수단, 카자흐스탄, 이란까지 여러 외국 대사관 저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에는 외국 공관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나 시위가 불가능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지난 2003년 위헌(違憲) 결정이 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단 이야기죠. 그 당시 재벌 입장에선 이게 굉장히 매력적인 입지 조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 한남나인원이 다 지어지면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날까.

저는 한남동 대저택을 산책하던 습관을 자연스럽게 끊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빠졌거든요. 그 대신 새로운 습관이 생겼어요. 직방과 네이버 부동산으로 감히 엄두도 못 낼 한남동 고층 아파트의 시세를 매주 확인하는 겁니다. 말하고 나니, 이것도 좀 우습네요. 아무리 제가 한 발 겨우 내딛어도 한남동은 시작부터 저 앞에 서 있었고 쌩쌩 달리고 있을 텐데 말이죠. 저에게는 절대 그림자도 잡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뭔가 한남동에 쏠리는 관심을 딱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도 아닌데. 언젠가 다시 그곳에 당당하게 돌아갈 날을 꿈꿉니다. 그건 돈이 안 드니까요.
 

▮ 덧붙이는 말 ▮
1. [광고] 제가 휴넷 <해피칼리지>라는 곳에서 ‘직장인의 내책쓰기’라는 주제로 동영상 강의를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래 주소를 눌러 볼 수 있습니다. 무료로 수강신청하시고, 별점과 후기 남겨 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8분 내외의 짧은 강연입니다. (https://goo.gl/sqcJuF)   

▲ 내책을 쓴다는 게, 끔찍하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2. 다음 주는 추석 연휴로 한 주 쉽니다. 따뜻한 대화와 맛있는 음식을 나누시면서, 소중한 분들과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3. 한남동 이야기가 벌써 열 편째입니다. 이전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하나씩 클릭해보세요. 서울시나 용산구 소셜미디어팀 연락주세요,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서울의 옛 동네에 대해 써드립니다.


4. 커버사진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한남동 자택입니다. 잘 나온 사진이 많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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