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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Oct 03. 2018

말과 글, 스피치라이터의 일

<週刊 태이리> 제22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언어는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다. 이 세상을 말과 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쓰삐찌-라이또’다.” 4부작 일본 드라마 <오늘은 일진도 좋고>의 도입부입니다. 본능적으로 끌려서 소설까지 몽땅 찾아 봤습니다. 평점은 별 3개 반. 꼭 스피치라이터가 아니라 해도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이 뭔지 곱씹는 좋은 기회가 되실 겁니다.


#1. 있지만 없고 없어도 있는, 직업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한 직업들을 종종 궁금해 합니다. 예전엔 범죄와 다투는 경찰이나 전쟁에 나선 군인 이야기가 인기 있었죠.  정치인, 변호사, 검사였다가 의사, 간호사와 기자, 아나운서로 바뀌더니 만화가, 카피라이터, 요리사까지 그 종류가 점점 더 다양해졌습니다. 최근에는 퇴마사나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도 여럿 있더라고요. 반면 ‘스피치라이터’가 주인공인 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꽤 흥미로운 일인데, 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 소설과 드라마는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일단 이게 지 설명하는 것부터가 좀 어렵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말과 글을 대신 써준다고?’ 정서상 납득이 안 되니까요. 한국고용정보원의 직업사전에는 ‘스피치라이터’ 혹은 ‘연설문작가’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유령으로 살 수는 없어 며칠 전 직업등재를 요청했습니다.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데, 예정대로라면 내년 4월 쯤 정식으로 검색이 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뭔가 시각적으로 지루 같기 때문입니다. ‘쓴다’(Writing)는 게 대부분 머릿속에서 이뤄지고 얼핏 보기에는 고작해야 손가락만 움직일 테니까요. 그러다보니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 별로 없습니다. 있더라도 로맨스나 스릴러를 꾸역꾸역 밀어 넣어서 그 직업 본래의 색깔이 슬그머니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 다른 작가들은 다 있는데 ‘연설문 작가’만 없다.

사람들은 ‘쓰기’ 행위를 외롭고 조한 작업으로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며칠 밤 이리저리 단어를 혼자 주물러대니까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글쓰기라는 게 건축이나 음악과 비슷한 면도 꽤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먼저 작가는 단어들이 잘 흘러가게 종이 위에 ‘길’을 냅니다. 문장을 쌓아 튼튼하고 보기 좋게 ‘집’도 짓죠. 문단 사이에 다양한 ‘리듬’과 ‘표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니 글쓰는 게 경쾌하고 뚝딱뚝딱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오늘은 일진도 좋고>의 작가인 ‘하라다 마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언어란 마물(魔物)이다. 격려하고 때론 상처 입히기도 한다. 이걸 어떻게 다룰까, 그건 말하는 사람에 달렸다” 말과 글이 사람들을 뒤흔들고 심지어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단 뜻입니다. 정말일까요.


#2. 말과 글의 힘을 믿는, 사람

이 책의 주인공 코토하(히가 마나미)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이쿠[俳句]의 베테랑인 할머니가 ‘시(詩) 수첩’을 만들어 떠오른 생각들을 담아보라고 몇 번 말해도 통 듣지 않거든요. ‘그저 말[言]이란 건, 물건을 사고 수다를 떨고 뒷담화에나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니다. 창립 80주년을 앞둔 과자 회사 다니는데, 승진에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쉬운 만 골라서 하다가, 맛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여섯 시 칼퇴하는 게 소소한 행복이죠. 직장인에게 ‘꿈’이란 사치고 ‘자아실현’은 헛소리란 걸 오래전 깨우쳤습니다.

▲ 그는 격(格)이 다른 축사로 청중을 압도한다.

어느 날 그 딱딱한 생각이 조금 말랑말랑해집니다. 짝사랑 소꿉친구 아츠시(와타나베 다이)의 결혼식에서 쿠온쿠미(하세가와 쿄코)의 축사를 들었거든요. 런 건 다 거기서 거기고 지겹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뭔가 다릅니다. 마지못해 하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사연이 꽉 담긴 수필이나 시(詩)에 더 가깝습니다. 차분해지길 기다려 천천히 시작했다가, 웃기고 울리며 클라이막스로 달려가는 방식은 흡사 오케스트라를 닮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라, 인생을 통틀어 좋은 것은 그뿐. 이렇게 뜻 깊은 날, 두 인생을 하나로 합쳐, 이제부터는 함께 걸어가라. 단 한 가지 좋은 것을 위해.” 그날 코토하는 할머니가 강조하시던 ‘말과 글의 힘’이 뭔지 조금 깨닫습니다.

▲ 미안하게도 모든 리더가 말과 글에 능숙할 순 없다.

“저 사람 직업이 뭔데?” “스피치라이터. 아버지 연설문도 저 분이 썼어.” 고인이 되신 아츠시의 아버 ‘아츠로(후나코시 에이이치로)’는 야당 사무총장인데 달변가로 유명했던 정치인입니다. “말과 글을 대신 쓴다고?” “응, 정확히는 함께 쓰지.” 잘 모르실 수 있겠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크게는 청와대나 정당에 있고 작게는 정부기관, 공기업, 그룹사에 하나 둘 있습니다. 저는 여기 있고요.

▲ 위대한 연설 뒤에는 성실한 스피치라이터가 있다.

미국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였던 케네디의 테드소렌슨은 변호사였고, 레이건의 페기누난은 방송제작자였습니다. 오바마의 설문을 쓴 존 파브르는 처음부터 전문 스피치라이터였다고 하네요. 문재인 대통령 옆에는 시인(詩人) 출신의 신동호 연설비서관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는 맑고 진중한 운율(韻律)이 느껴지고, 눈 앞에 어떤 심상(心象)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3. 마음을 흔들고 세상을 바꾸는, 꿈

별다른 꿈도 열정도 없었던 코토하는 쿠온쿠미라는 스승을 만나 스피치라이터의 길에 뛰어듭니다. 이 책이 다른 이야기와 좀 다른 건, 소설이면서도 실무적인 글쓰기 팁을 깨알같이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그는 전설의 스피치라이터가 하나씩 풀어놓는 글쓰기 비법들을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하나씩 익혀 갑니다. 나중에 아츠시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지방선 야당 초선위원으로 나서는데, 코토하가 그 연설문을 쓰게 되면서 이야기는 좀 더 크고 묵직해집니다. “목적을 명확하게 해라. 에피소드를 풍부하게 넣어라. 의미를 담되 노골적이어선 안 된다. 말하는 시간을 철저하게 기록해라.” 코토하는 쿠온쿠미에게 배운 이런 가르침들을 되새기면서 제 역할을 묵묵하게 해나갑니다. 글 쓰는 모 사람들이 주목할 자세들이 여기 잘 나와 있습니다.

▲ 어설픈 자기계발서의 훈계보다 꽤 실무적이다.

이야기는 성장 소설의 패턴을 충실하게 따릅니다. 주인공은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조금씩 무림의 고수로 성장해 가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쳐옵니다. 아츠시의 아내인 에리가 유산을 해 가장 중요한 연설을 하기 어렵게 되고 만 겁니다. 동네 병원들이 여러 번 진료 거부를 했기 때문인데, 아츠시는 그 힘든 상황에서 더 큰 용기를 냅니다. 장밋빛 공약을 걷어내고, 정부의 잘못된 의료정책과 환자들의 불편을 아주 구체적으로 연설에 담은 겁니다. 아츠시의 마지막 연설은 거짓약속을 거듭해온 여당과 정부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결국 야당은 연설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권교체에 성공합니다. 반 없는 해피엔딩.

▲ 스피치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믿음이 중요하다.

이야기 그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제 눈을 더 강하게 끌어당긴 건 혀끝에 맴도는 여러 개의 아포리즘입니다. 밑줄을 그었다가 언젠가 사용해보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 3시간 후, 24시간 후, 그리고 사흘 후의 나를 상상해보면 좋다. 멈추지 않는 눈물은 없다”는 위로는 담담하면서도 감성적이라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의 울림을 신비롭게 묘사한 수많은 표현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말은 쓰거나 읽는 게 아니다. 다루는 거다.” “내 주변에 제대로 말을 걸면 세상이 바뀐다.” “스피치를 잘 조절하면 세상 전체가 잘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중에서도 제 심장을 다시 뛰게 한 건, 쿠온쿠미의 이 한 마디였습니다. “언젠가 세상을 바꿀 스피치를 쓰고 싶어.” 네, 저도 그래요. 말과 글로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스피치라이터라는 제 직업을 많이 좋아합니다. 오랫동안 점점 더 잘 하고 싶습니다.


▮ 덧붙이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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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천절입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죠. 어디론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싶은 하늘입니다. 이 글을 마치고 가까운 산에 오를까 합니다.


4. 이번 리뷰는 책을 기준으로 작성하되, 장면이나 등장인물은 드라마를 참고했습니다. 일본 드라마는 네이버에서 무료로 보실 수 있으니 검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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