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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Oct 10. 2018

그땐 있었고, 지금은 없다

<週刊 태이리> 제23호

매번 쓰지만 힘이 듭니다. 어깨에 힘을 빼려고 애쓰지만, 그게 잘 안 되고요. 벌써 열 한 개의 한남동 이야기를 썼으니 마땅한 글감이 별로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심호흡을 하고 한남동 주변을 다시 살펴봅니다. 이런 걸 써도 될까 싶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부모님, 친구, 형 , 누나, 길렀던 강아지, 한참을 헤매던 골목길, 짝사랑했던 소녀, 잃어버린 물건, 불량식품을 팔던 문방구, 숨겨둔 성적표까지 기억을 몽땅 꺼내 놓고 나 뭘 쓸지 생각이 살짝 열립니다.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자신이 없지만요.

    

#1. 홍수와 <아이큐점프>

한강과 맞닿은 이곳 한남동은 1980년대 상습 침수 지역이었습니다. 비가 조금 많이 온다 싶으면 어린 아이 엉덩이까지 물이 금방 찼습니다. 하수도가 쑤왁쑤왁 하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모든 걸 빨아들일 듯 으르렁댔고, 한강은 제 집 넘나들 듯 안방을 맘대로 걸어 다녔습니다. 그나마 제가 사는 하늘 가까운 윗동네는 조 안심할 수 있었지만, 여기도 배수사정이 좋지 않아 늘 조마조마했습니다. 지금이야 제방공사도 하고 상하수도 시설이 좋아 다행이지, 예전엔 여기가 별로 살 만한 곳이 아니었어요.

▲ 1972년 홍수로 잠긴 한남역 주변의 모습이다

제가 초등학교 다닌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직접 겪은 큰 홍수만 대충 세어도 다섯 번은 더 됩니다. 통계청 기록을 살펴보니,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둔 1986년 8월에 태풍 베라가 상륙해 3일간 서울 중부 지역에 집중호우를 내렸습니다. 국가차원의 피해규모는 372억 원, 제가 살던 빨간 기왓집에서는 TV며 선풍기가 몽땅 젖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다음해인 1987년에는 태풍 셀마가 들이닥쳤고, 이후로도 매년 여름마다 강도처럼 태풍이 왔습니다. 홍수가 지나가면 소독차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곤 했습니다.   

▲ 1980년대 <아이큐점프>의 인기는 홍수를 능가했다.   

그 중 조 특별하게 기억하는 건 1991년 8월에 불어닥친 태풍 글래디스호입니다. 6학년 여름이었는데 그림일기장에 매일 비가 온다고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2학기 교과서며 방학 숙제한 모든 게 물에 휩쓸려가서 반 아이 대부분이 과제물을 내지 못했거든요. 홍수에도 아랑곳 않고 저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 당시 유행했던 <드래곤볼> 해적판이나 만화 잡지 <아이큐점프>를 사려고 매달 혈안인데, 아랫동네의 서점 주변에선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크고 빨간 고무 대야 위에서 노를 저으며 줄을 서고 있었거든요. 홍수도 그 인기를 막지 못하고 60만 부나 발행하던 <아이큐점프>는 2004년 폐간했습니다.

     

#2. 징검다리와 비바백화점

그 시절 순천향병원 주변에는 공터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은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진 땅이 한남동 여기저기 수두룩했고 아무 데나 수풀을 헤치면 방아깨비와 메뚜기 수십 마리가 날아 올랐습니다. 아직 아스팔트가 단단하지 않은 도로 주변의 모래를 조금만 파도 땅강아지 서너 개는 금방 잡혔습니다.

▲ 한남동 고가도로는 1977년 지어졌고 이제 곧 사라진다.    

도저히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은 8차선 도로가 있는 한남 나인원(옛 단국대학교)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고, 한남초등학교를 가려면 징검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습니다. 이 물이 어디로 흐르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지금 이곳은 서울에서도 교통량이 제일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입니다. 이 모든 게 지금은 다 없어졌죠. 아니, 어쩌면 제가 적어 놓은 기억들이 누군가에겐 ‘한남동 전설’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 비바백화점은 용산구에 처음 생긴 고급 백화점이었다.

또 하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이태원의 랜드마크인 ‘제일기획’입니다. 이 건물은 처음엔 ‘비바백화점‘이라는 곳이었어요. “1991년 8월 24일, 젊은 백화점 비바 탄생! 이태원에 새로운 쇼핑이 열린다!‘라는 카피를 단 동영상 광고가 아직도 인터넷에 검색됩니다. 야심차게 문을 열었지만, 개장 1년 만에 경영난으로 건물이 매물로 나왔고 제일기획이 경매로 낙찰 받아 1998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당시 3.3㎡(1평)당 1천만 원도 안 했다고 하던데, 지금은 1억 원을 훌쩍 넘네요.

   

#3. 거북사우나와 이태원랜드

한남동에서 제일 크고 쾌적했던 목욕탕 중 하나는 ‘거북 사우나’였습니다. 한남오거리, 그러니까 지금은 GS제3한강교 주유소가 있는 건너편에 있었죠. 4층이 남탕이고 여탕이 한 층 위였는데, 남탕 휴게소가 5층이라 작은 구멍 틈으로 여탕 탈의실이 보인다는 찌라시가 한참 돌았습니다. 목욕비가 그 당시 5천원 정도로 좀 비쌌는데 90년대 중고등학생 시절을 한남동과 보광동에서 지난 남자 분이라면, 그 말에 혹해 한 번은 가보셨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그 구멍이란 걸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고도의 노이즈마케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이태원랜드는 외국인들이 즐겨찾는 스파명소가 됐다.

거북탕의 명성에 도전한 목욕탕은 ‘이태원랜드’입니다. 이태원역 3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고, 제일기획에선 바로 내다보입니다. 처음 생겼을 땐, 이렇게 큰 찜질방이 있나 싶을 정도였어요. 드라마 <시크릿가든>에도 나오면서 유명세를 타다가 소유권 분쟁으로 한참 시끄러워 문을 닫았습니다. 요 며칠 이슬람사원 주변을 구경 가 봤는데, 언젠가부터 다시 장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엔 할랄푸드 음식점과 마트가 많아서 이색적인 느낌을 줍니다. 한 번 가보세요. 한 쪽으로 트랜스바가 즐비하다는 것도 미리 알아 두시고요.       

▲ 태평극장에서 락월드로, 다시 이태원랜드로 변했다.  

살펴보니 이곳 ‘이태원랜드’는 사연이 참 많더군요. 원래는 60년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신성일 씨가 소유한 ‘태평극장’이었는데 그 당시 이태원이 서울 변두리라 3류 취급을 받아 80년 11월경 폐업을 했다고 해요. 이후 80년대 중반 ‘한국 락의 아버지’라는 신중현 씨가 인수해서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전용 공연장인 ‘Rock World'를 차렸다고 합니다. 시나위가 여기서 공연을 했다는데,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관객이 없어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찜질방으로 쓰고 있고요.      

▲ 어찌할 줄 모르던 글을 완성할 때의 희열은 꽤 크다.

떠나가고 사라진 것들을 하나씩 꺼내고, 기억의 먼지를 툭툭 털고, 그 뒷이야기를 따라 몇 시간 걷다보니 제 이야기는 어느 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쓰기 시작할 때는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아니 마감 내에 분량을 채울 수나 있을지 걱정했는데 결국 이렇게 또 쓰게 됩니다. 글은 정말 다 쓰기 전에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써보세요. 글은 쓰기 전엔 아무도 모릅니다.


▮ 덧붙이는 말 ▮ 

1.  [알림] <週刊태이리>의 구독료를 월 9,900원에서 3,300원으로 내립니다. 이미 신청해주신 분께는 남은 기간 동안 변경된 구독료로 낮춰 발송해 드립니다. 사은품은 제외됩니다.  (*카카오뱅크 3333-0527-66818) 구독료를 다시 산정해 개별안내해 드리겠습니다.    

 

2. 주변에서 가끔 저보고 글을 어떻게 쓰냐고 묻기에 짧게 대답합니다. 저는 마감시간이 다 되면 극도로 초조해지다가 나중엔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그게 오히려 글쓰기를 방해한다는 걸 알기에 손가락 가는 대로 일단은 막 적어봅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모았다가, 여기저기를 다시 잘라내면 그럴 듯한 모양이 되는데, 여기에 이미지를 만들어 붙이고 제목을 달면 읽을 만한 글이 됩니다.     


3. 요사이 꽤 바빠서 글 쓸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매주 1회 정해진 분량을 기한 내에 써내자는 게 제가 지키는 단 하나의 약속입니다. 


4. 커버사진은 1980년대 후반의 한남동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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