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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Oct 17. 2018

취준생의 이력서와 자소서

<週刊 태이리> 제24호

공식적으로 4개, 비공식적으로 7개 회사를 다녔습니다. 직원이 다섯 명인 작은 사무실부터 30대 기업의 계열사와 지주사, 정부 산하의 공기업까지 ‘넓게’ 훑었습니다. 산업군이 다양합니다. 출, 교육, 중공업, 식품, 화학, 의약, 에너지까지 적고 보니  많네요. 어딜 가도 저를 제일 먼저 따라온 건 항상 ‘말과 글’이었습니다. 끝까지 저를 괴롭히는 것도 ‘말과 글’이고요. 저 같은 스피치라이터가 아니어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말하느냐’는 월급쟁이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특히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면 ‘말글쓰기’를 잘해야 합니다.    


#1. 좋은 삶이 좋은 질문을 만든다

‘이력서’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써 본’ 글입니다. 거기엔 수십 개의 줄이 가로세로 그어져 있는데, 그 안에 이름, 나이, 출생연도, 학교, 주소, 사회생활, 수상경험, 좌우명, 학점, 자격증, 토익점수, 심지어는 가족사항과 취미까지 빼곡하게 적어 넣습니다. 네모 한 칸을 잘 채우는 건 오랜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 그리고 주말 봉사활동과 인턴, 학원 수강, 유학, 교환학생, 군대까지 짧게는 20년, 길게는 25년에서 30년이 걸립니다. 입맛대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립니다.

▲ 이력서와 자소서는 ‘나’를 파는 마케팅 제안서다.

이력서보다 다섯 배는 더 어려운 게 ‘자기소개서’입니다. 이력서가 객관식이라면 이건 ‘논술’이거든요. 겉으로는 성장환경, 장단점, 좌우명, 가장 힘들었던 일,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를 담담하게 묻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것을 더 궁금해 하는 겁니다. ‘너는 남들과 무엇이 다르냐’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라는 두 가지 거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소서를 쓰면서 이번 생(生)을 처음 되돌아보게 됐다”라는 물기어린 취준생의 고백과 간증은 그저 가벼운 농담이 아닙니다. 써 보기 전엔 잘 모릅니다. 정해진 글자 안에 ‘나’를 제대로 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연극무대에 오른 것처럼 나를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면접’이라는 게 또 있죠. 자기소개서가 ‘스크립트’라면, 면접은 그 대본을 무대에 올린 ‘연극’과도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는 ‘사이코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내 자신을 탈탈 털어내야 합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라는 텍스트에 담아 놓은 ‘가장 멋진 나’를 무 살풀 하듯 생생하게 불러내 면접관에게 직접 보여주는 거죠. ‘내가 누구인지, 여기엔 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내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육하원칙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 대답들이 면접관을 만족시켜야 하고요. 


#2. 자소서의 질문과 답은 정해져 있다

이력서가 점을 찍는 거라면, 자기소개서는 그 점을 잇는 겁니다. 면접은 선으로 면을 그려서 그 위에 색과 소리까지 입히는 거고요. 경력의 경우엔, 시간 순서가 아니라 최근 일부터 쓰는 게 좋습니다. 회사를 몇 군데 옮겼다면, 그 횟수를 부각하는 게 아니라 ‘이직의 방향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회사에 적응을 잘 못하나?’가 아니라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참 다양한 일을 했구나’라고 알려주는 거죠. 신입이라고 조바심 내지 마세요. 이력서의 작은 점들을 모아 한 방향으로 선을 긋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과감하게 지워 내세요. 그것만 잘 해도 돋보입니다.     

▲ 이력서에는 중요한 것 먼저 쓴다

가끔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자기소개서는 글 솜씨로 채우는 게 아닙니다. 신춘문예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력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재료가 없으면 일류 쉐프들도 라면밖에 못 끓입니다. 이게 뭔 말이냐면, 일단 뭔가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단 이야깁니다. ‘삶이 엉망인데 글은 잘 쓴다?’ 아이고, 이건 불가능해요. 썩은 야채와 고기는 아무리 잘 구워도 먹을 수 없잖아요. 힘들게 좋은 글감들을 모았다면 이걸 누가 왜 읽는 건지 잘 따져보셔야 합니다. 독자의 눈높이에서 궁금한 것들을 긁어줘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안 돼요. 사랑하는 이에게 프로포즈하듯 절절하고 진솔해야 합니다.      

▲ 왜 당신에겐 내가 필요한지 그걸 말해야 한다.

면접까지 오셨다면, 경쟁률은 확 떨어집니다. 쇼핑으로 치면, 마트 진열대에서 ‘나’라는 상품이 선택된 겁니다. ‘카트’에 쏙 들어가서 계산대까지 온 거죠. 마지막으로 카드를 꺼내기 전에 불필요한 걸 사진 않았나, 비슷한 걸 두 개 사진 않았나, 유통기한이 넘었거나 제품의 질이 떨어지진 않나 생각해보는 겁니다. 면접관들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을 처음 보기 때문에, 이력서와 자소서에 적힌 것들을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시험문제가 교과서에서 나오듯, 결국 내가 써낸 자소서를 잘 읽고 예상질문을 뽑아 보는 게 좋습니다. 그 회사의 1년간 기사를 뽑아서 반복되는 키워드는 따로 정리해두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3. 면접에선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줘라

면접에서 묻는 건 딱 두 가지입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내가 누군지 아냐’ 그런데 가끔은 일부러 면접자의 약점만 물어보기도 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게요. P라는 철강 회사였는데 “국문과가 여기 와서 뭘 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니, 할 게 없으면 서류에서 탈락을 시켰어야지. 바쁜 사람 불러서 저게 뭔 소리야.’ 급기야는 제게 “‘산화환원반응의 화학식’을 쓸 수 있는지, ‘철[iron, 鐵]’의 원소기호가 뭐고, 주기율표 몇 번에 있는지”까지 물어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몰랐는데 지금 와서 그걸 알 리가 없습니다. 잠시 말문이 막혔어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 주기율표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

“대답하기 어렵죠?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문과 학생들에게는 힘들죠.” 문이 잠겼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속에 출구가 숨어 있습니다. “네, 어렵네요. 정말 모르겠어요. 며칠 동안 홈페이지부터 기사, 소셜미디어까지 싹 다 뒤져봐도 회사가 말하려는 게 뭔지 통 모르겠어요.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시더라고요. 이 회사는 너무 어렵다고.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이거 문제 아닌가요?” 약간은 도발적인 제 이야기에 꽤 호기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때 말을 이었습니다. “좀전에 저더러 뭘 할 수 있냐고 물으셨죠. 어려운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몇 사람만 알아먹는 복잡한 소리가 아니라, 모두가 이해하는 편안한 말로 바꿀 수 있어요. 제가 여기서 할 일은 ‘번역’입니다. 회사 안의 이야기를 바깥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일이요. 중요한 일이에요.운 좋게 말 장난에서 이긴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이 뭔지 오랫동안 고민했기에 할 수 있던 말입니다.

▲ 어려운 말만 계속 하는 건 배려심이 없는 거다.

오기로 면접을 보고 나니, 다리가 좀 후들거리더라고요. 드라마 주인공처럼 너무 폼을 낸 건 아닌가 싶고. 떨어지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할 말은 한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도 대답을 못 한 건지 2주 후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면접관이었던 상무님을 나중에 만났는데, 그때 좀 재밌었다고 하시더라고요. “회사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 그래서 쉽게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다들 딴 소리만 하는데 네가 딱 그 말을 하더라고. 듣고 싶은 말. 그런 걸 기다렸지. 그런데 자신 있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죠. “이제 쉬워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그때 언론과 기업문화를 담당했습니다. 몇 년 후 나와서 다시 보니, 그곳의 말투들이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더라고요. 제가 했던 일이 아주 엉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회사 생활은 ‘말과 글’의 연속이다.

처음엔 슬기로운 쓰기 생활’에 대해 적으려고 했는데 다 쓰고 보니, 취준생 이야기네요. 글이란 건 이렇게 다 쓰기 전까지는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음 번에 다시 써 볼게요. 아무튼 말글쓰기는 취준생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고, 회사에 들어오면 더 중요해집니다. 회사 일이란 게 따지고 보면 전부가 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거든요. 이력서부터 사표까지.       

 

▮ 덧붙이는 말 ▮    

1. [알림] 10월부터 구독료는 월 3,300원으로 낮췄습니다. 구독료를 받는 건, 콘텐츠에 대한 약속이고 제게 보내주시는 응원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구독료의 절반은 따로 모아서 분기별로 기부를 할 생각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현금이 좋을지, 어떤 게 좋을지 고민 중입니다.    


2. [알림] 한남동 이야기를 매번 홀수차에 발행해 왔습니다. 소설 쓰기에 몰입하려고 하다보니, 시간이 좀 부족합니다. 이야기 발굴에도 어려움이 있고요. 아직 자료 조사가 덜 된 이야기들을 글로 쓰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홀수차에 ‘한남동 이야기’를 빼고 ‘회사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3. 휴넷 해피칼리지 직장인 강사 오디션에서 최종 10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아마도 올해 안에 정규 강좌를 개설할 수 있겠네요. 고맙습니다.     

https://goo.gl/sqcJuF  «- 강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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