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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Oct 24. 2018

회사란 무엇인가

<週刊 태이리> 제25호

스물일곱부터 지금까지 ‘회사’란 곳을 다섯 군데 이상 다녔습니다. 짧게 1년, 길게는 5년 다닌 직장을 홀연히 떠나는 게 간단할 리 없습니다. 정든 분들과 인사하고, 다시 낯선 사람과 환경에 새로 적응하는 건 꽤 번거롭고 어렵습니다. 불편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직을 서너 번 하면 모든 걸 새롭게보고 관찰하는 ‘여행자의 눈’을 갖게 되니까요. 다양한 기업문화를 경험한 덕에 월급쟁이지만 회사의 경계를 넘나며 살아갑니다. 한 곳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회사를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문득 지나온 여러 회사를 비교해보다가 신기하게도 회사는 어딘가 조금씩 닮아 있고 흐름이 비슷하다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회사는 뭘까, 제가 잘 아는 세 가지에 빗대어 봅니다.    


#1. 시트콤, 웃픈 이야기

회사는 한 편의 ‘시트콤’입니다. <순풍 산부인과>, <남자 셋 여자 셋>,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 같은 거요. 아예 미국에는 이름부터가 <더 오피스>인 것도 있습니다. 회사와 시트콤에서는 매번 어떤 상황이 주어지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그것을 그들의 방식대로 해결합니다. 사건들은 얼핏 모두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질서 속에서도 하나의 틀을 지키며 움직입니다. 출근을 하면 극(劇)이 시작되고, 퇴근 하면 잠시 멈춥니다. 이걸 특수효과 처리하면 ‘다음 편에 계속’이란 자막이 머리 위에 두둥실 떠 있을 것 같습니다.

▲ 시즌9까지 나왔는데, 미국식 병맛이 일품이다.

만약 드라마 <미생>같은 회사생활을 하고 계시다면, 힘드시겠지만 축복 받은 겁니다. 무뚝뚝하지만 내 새끼들을 잘 챙기는 워커홀릭 오 차장(이성민), 의리와 뚝심으로 사는 멘토 김 대리(김대명), 신망이 두터운 워킹맘의 롤모델 신차장(선지영)은 제가 아는 범위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을 만큼 괜찮은 인물입니다. 한석율(변요한), 안영이(강소라), 장백기(강하늘) 같은 동료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상위 10%에 드는 좋은 회사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장 힘들어도 뭔가 해볼 마음이 듭니다.    

▲ 회사생활을 진지하게 다룬 리얼 드라마다.

회사라는 시트콤의 캐릭터 설명을 하자면, 김 부장에게는 배울 게 없고, 이 팀장은 책임을 미루기 일, 다음 번 승진을 노리는 황 차장은 꼰대들에게 잘 보이려고 악역을 도맡아 사내 정치 중심에 섭니다. 홍 과장은 산더미 같은 일에 치여 늘 짜증을 내고, 정 대리는 그 일을 다시 떠맡느라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박 신입은 열 넘치고 학점이 좋지만 대체로 어리바리하고, 응석받이거나 지나치게 개인적입니다. 이렇게 세팅하면 얼추 현실 속 회사와 비슷해집니다.  웃기고 슬픈, 애증의 무대죠.  


#2. 성장소설, 나고 자라 사그라지는

회사는 한 편의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김연수의 <원더보이>, 팀 보울러의 <리버보이> 같은 이야깁니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어른이 아닙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거나,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년과 소녀입니다. 그들은 모든 게 처음인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치며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신입사원들도 보고서 작성, 분기별 전략회의 참석, 클라이언트 접대, 복사, 녹취, 커피 심부름, 회의 준비까지 수많은 일에 휩싸이며 갈등하고 좌절합니다.     

▲ 직장인은 서로서로 닮아가며 제 역할을 한다.

성장소설 속 인물들은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자기만의 알을 깨고 어떻게든 자기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먼 여행을 떠나고, 길 위에서 스승을 만나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거나, 무림 고수에게 비법서를 건네받기도 하고요. 그걸 견뎌내는 사람은 청년이 되고, 어른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직장인은 출퇴근을 하고, 업무 매뉴얼을 학습하고, 모진 상사에게 거친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게 대리가 되고, 과차장이 되고, 팀장이 됩니다.   

▲ 대졸 신입사원이 팀장만 달기도 꽤 힘들다.

월급쟁이가 임원의 반열에 오르는 건 또 다른 ‘신(神)의 영역’입니다. 대졸 신입사원 0.7%에 들어야 가능합니다. 대체로 대리까지는 연차를 채워 그냥 올라가고, 과장부터는 그럴 듯한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차장은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거나 눈치가 빨라야 하고, 부장은 평판과 운도 따라야 합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자료를 살펴보니, 임원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2년쯤이라고 합니다. 평균 근속연수가 15년이니, 대부분이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회사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렵습니다.    


#3. 그들만의 높은 성, 엄격한

회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성(城)’입니다. 그것도 왕과 신하, 기사, 농민, 노예가 엄연한 중세 시대죠. 출신과 계급이 분명히 그어져 있습니다. 어떤 경로로 입사했는지에 따라 세력이 갈리고,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권한과 책임이 다릅니다. 한국에서 공채는 그 회사가 키워낸 ‘내 새끼’입니다. 못나도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공채를 중심으로 모든 제도가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기업 내 요직(要職)인 인사팀, 기획실, 비서실은 대부분 공채로 채워집니다. 좀 당황스럽지만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 ‘조직 안에 내 편이 얼마나 많은지’로 승진하기도 합니다.  

▲ 죽으나 사나, 자기들의 성을 쌓고 사는 게 회사다.

‘경력직’은 그 힘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성실해도, 지지 기반이 거의 없거나 약한 ‘주변인’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채들은 입사부터 지금까지 한 배를 타고 온 형님과 동생 사이거든요. 반면 경력직은 채용 그 순간부터 질투와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습니다. 그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들어오지만, 그저 ‘용병’일 뿐입니다. 권력 라인을 타려고 노력도 해보지만, 그 틈에 자연스럽게 끼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고 오래된 조직일수록, 그 유리장벽이 두껍습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다면, 몸값 올리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직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이 더 쉽고 옮길수록 연봉은 올라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 경력직은 흘러가지 않고, 헤엄쳐야 한다.

이직을 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 흘러 다니면 안 된다는 겁니다. 유행을 따라, 월급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지겨워서, 홧김에 옮기는 건 금물입니다. 아무렇게나 흘러가서는 안 되고, 나의 의지로 헤엄쳐 가야 합니다. 목표를 향해 자기 두 팔을 저어 하나의 방향성을 갖고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직 ‘횟수’가 많은 건 용서가 되지만, 이직 ‘동기’가 애매한 건 설명할 수가 없니다. 노려보는 면접관들에게 “내 인생의 그래프는 한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걸 차분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경력자들에게 ‘평생직장’은 없지만 ‘평생직업’은 있습니다.     

▲ 생각을 말과 글로 바꿔내는 것, 평생직업이다.

저는 사보, 브로슈어, 단행본 같은 홍보인쇄물의 기획안을 짜고, 취 하고 다듬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기본기를 닦아 인하우스의 사보 담당자로 변신했고, 다시 30대 기업의 언론과 기업문화로, 또 한 번 100년 장수기업의 사사 제작과 연설문 작성으로 일을 넓혀 갔습니다. 한 곳에만 있었으면 한 가지 일에 파묻혔을 겁니다. 무대를 옮기며 홍보인으로 10넘게 았는데, 남들과 다른 전문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스피치라이터’입니다. 즐겁게 배우면서 제 일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회사 이야기 시작해 뜬금없이 사랑 고백으로 글을 끝맺습니다. 좋은 말과 글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알림] 한남동 이야기를 매번 홀수차에 발행해 왔습니다. 앞으로는 홀수차에 ‘한남동’을 잠시 빼고 ‘회사’를 쓰려고 합니다. 상사와의 관계, 연봉협상, 보고서작성, 워라밸, 이직, 직장인의 애환을 에피소드와 함께 담겠습니다.    


2. [알림] 10월부터 구독료는 월 3,300원으로 낮췄습니다. 구독료의 절반은 따로 모아서 1년에 두 번 기부할 생각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현금이 좋을지, 어떤 게 좋을지 찾아보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 주시면 잘 읽어보겠습니다.    


3. 휴넷 해피칼리지 직장인 강사 오디션에서 최종 10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아마도 올해 안에 정규 강좌를 개설할 수 있겠네요. 강좌명은 <직장인의 쓰기생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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