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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Oct 30. 2018

우리 인생도 “중쇄를 찍자!”

<週刊 태이리> 제26호

아직 한 해가 다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드라마 <중쇄를 찍자>를 2018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만한 에너지와 소소한 재미, 그리고 진한 감동까지 균형 있게 잘 담은 이야기를 만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이 작품은 마츠다 나오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데, 여자 유도선수 출신 쿠로사와 코코루(쿠로키 하루)가 주간 《바이브스》의 만화 편집자로 일하면서 벌어지는 10부작 이야기입니다.     


#1. 조금은 다른 성장소설

<중쇄를 찍자>는 윤태호의 <미생>과 자주 비교되곤 합니다. 취업과는 무관하게 살아오던 예체능 특기생이 갑작스러운 계기로 ‘직장인의 세계’에 들어온다는 시작부터가 일단 비슷하죠. 아무 것도 모른 채 열정만 가득한 주인공이 멘토와 동료를 만나 일을 조금씩 배워가고 성장한다는 흐름도 꽤 닮았습니다. 업종은 다르지만 둘 다 출판사와 무역상사(商事)라는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성장소설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데미안>과 같은 성장소설들의 주인공은 다 큰 성인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 아이입니다.    

▲ 둘은 종종 비교되지만 미묘한 온도차가 있다.

비슷한 두 이야기에도 확실히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캐릭터의 외모나 성격입니다. 장그래(임시완)는 침울하고 냉소적이면서 예리하고 신중한 반면, 쿠로사와(쿠로키 하루)는 밝고 씩씩하고 지나치리만큼 싹싹하며 열정적입니다. 둘은 입사 조건도 다릅니다. 장그래는 계약직이고, 쿠로사와는 정규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장그래는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데도 잘 안 돼서 애처롭지만, 쿠로사와는 처음부터 내 자리인 양 여기저기 헤집고 다닙니다. 주변의 응원과 도움을 받아 1년 만에 ‘중판출래(重版出來)’라는 목표도 보란듯 이뤄냅니다. ‘중판출래’는 ‘인쇄한 책이 다 팔려서 다시 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사랑받는 이야기라는 뜻이죠.    

▲ 눈이 쾡한 장그래와 달리, 쿠로사와는 늘 웃고 있다.

제가 생각할 때  두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는 서사의 큰 줄기가 흘러가는 방향입니다. <미생>은 주인공의 내면보다는 ‘바깥세상’의 디테일한 묘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사고팔고, 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무슨 상품을 어디서 얼마에 사서 언제 어디에 팔아야 이득을 얻는지, 보고서는 어떻게 쓰고, 어떻게 해야 승진 하는지를 객관적인 숫자와 사례를 들어 말합니다. <중쇄를 찍자>의 시선은 바깥이 아니라 ‘마음 속’을 향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화를 왜 그리고 읽는지, 이야기에는 무슨 생각이 어떻게 담기게 되는지, 만화가와 편집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사건 중심으로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이야기에도 체온이 있다면 TBS의 <중쇄를 찍자>가 tvN의 <미생>보다 3도쯤은 더 따뜻할 것 같고, 저는 그 온도차가 맘에 듭니다.

   

#2. 성실과 노력과 운, 그 위의 재능

드라마는 매 화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만년 어시스트 ‘누마타 와타루(무로 츠요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기 만화작가 미쿠라야마 류(코히나타 후미요) 작업실에서 배경을 그리거나 그림을 수정하는 일을 돕습니다. 스무살 무렵 신인상까지 받은 유망주였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매번 늦게까지 남아 뒷일을 챙길 정도로 성실하고 만화에 대한 지식과 열정도 넘치지만, 딱 하나 ‘재능’이 부족합니다. ‘언젠가는 나만의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내 만화를 알아보는 편집자를 만날 거야’ 이런 말을 되뇌다 보니 훌쩍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 잔인하게도 재능의 유무는 끝까지 가보기 전엔 모른다.

누마타는 후배들의 데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지만 참고 또 견디며, 그 오래된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언젠가는’이라는 주문을 다시 외우며 계속 도전합니다. 저는 그런 누마타의 데뷔를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기다려 봅니다. 꽃은 늦게 펴도, 필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 바닥에는 “된다”는 보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버티는 것 자체가 재능”이라고 위로하지만, 애처롭고 씁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나는, 먹고 살려고 허둥대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라는 오기와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릅니다.      

▲ 천재 앞에 절규하며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슬프게도 그는, 나카타 하쿠(나가야마 켄토)라는 천재를 만납니다. 한 번도 만화를 그려본 적이 없는 똥손인데, 휙휙 그려대는 것마다 새롭고 기발합니다. 그의 콘티를 보자마자 차원이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아챕니다. 질투, 시기, 분노, 체념, 그 어지러운 감정들 사이를 애처롭게 방황하던 누마타는 주저앉아 펑펑 울어 댑니다. 어딘가 그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그는 한계를 고백하며, 마흔 평생 걸어왔던 만화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다른 일을 찾습니다. 몰랐으면 차라리 좋았을 걸, 알아 버린 겁니다. ‘창조’는 ‘신(神)의 영역’이라는 걸. 노력한다고, 운이 좋다고, 돈이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3.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건 ‘글쓰기’뿐

화가는 빈 도화지에 ‘선’을 긋고, 음악가는 빈 악보에 ‘음표’를 그리며, 작가는 빈 노트에 ‘글’을 씁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검은 커서가 껌뻑이는 모니터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우주 공간에 버려진 <인터스텔라>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고작 이런 ‘브런치’ 하나 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태백산맥>이나 <혼불>같은 대하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수고는 얼마나 클까요. 제가 운 좋게 짧은 단편을 발표해도 비슷한 작품들에 파묻혀 아마 흔적조자 안 남을 겁니다. 발버둥 쳐도 결국 ‘One of Them'이 될 가능성이 크죠. 한 마디로 투입량 대비 산출량을 전혀 확신할 수 없는 게 바로 글쓰기입니다. 이런데도 글을 써야 할지 확신이 잘 안 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 빈 여백을 채우는 건, 고달프고 황홀한 일이다.

가끔은 글을 쓰지 않는 제 삶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어차피 몇 명 못 들어가는 그런 유토피아는 애초부터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남들처럼 토익 900점은 기본, 가능하면 해외 봉사활동도 해줍니다. 홈페이지를 뒤져 인재상을 달달 외우고, 자기 최면을 걸고 면접에 들어갑니다. 회사원이 되면 대리 때까지는 종자돈을 모아 주식을 하고, 과장이 되면 대출을 받아 용산구 한 복판에 ‘똘똘한 한 채’를 사는 겁니다. 이렇게 묵묵하게 30년쯤 살다가 명예 퇴직을 하면, 서울이나 그 주변에 30평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금수저로 시작했다면 건물주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로또가 아니라면 그건 이미 글렀습니다.     

▲ 매일 쓰는 습관이 언젠가는 당신을 구원한다.

운이 좋으면 말한 것들의 절반 정도는 현실이 될 겁니다. 2058년엔 팔순이 넘어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해지겠죠. 2068년 즈음 아흔 되는 날 눈을 감을 텐데, 이대로라면 큰 공허감에 시달릴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도 내 죽음과 함께 몽땅 사라져 버릴 테니까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들이라해도 제 삶을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건 반드시 스스로 해야 할 이니까요. 사진이나 동영상을 만장 남겨도, 거기엔 껍데기만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자랐고, 이 세상에 무얼 남기려 했는지, 나를 대신해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글쓰기’밖에 없습니다. 뭐든 쓰고 남겨서 내 인생도 ‘중판출래’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제가 <중쇄를 찍자>에 마음이 머무는 건, 거기선 만화가를 ‘예술가’로 정당하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만화가 오랫동안 미성숙의 상징이었고, 그런 만화를 그리는 일은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B급 취급되던 때가 있었죠. 그러니까 <중쇄를 찍자>는 만화 잡지를 매주 발행하는 일본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2016년 기준으로 일본의 만화 시장은 한국 돈으로 연간 3조 103억 원 규모고 우리나라는 4천 965억 원입니다. 얼추 계산해도 6배가 넘는 차이네요.    


2. 제 주변에도 누마타 같은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막막하고 불안해도 꿈을 위해 버티는 음악가, 취업하지 않고 신춘문예에 몇 년째 응모하는 문학청년, 회사를 그만두고 드라마를 쓰는 방송작가 지망생.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수많은 기회비용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겁이 많았던 저는 한 쪽을 과감하게 결정하진 못했습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말과 글을 쓰는 입장이지만, 어쩌면 이들의 모습이 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어 선택한 이 길이 그 당시의 저에겐 최선이었을 거라 생각하며, 새로운 최선을 또 한 번 만들기 위해 아직까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3. 교육전문기업 휴넷이 오픈한 ‘해피칼리지’에서 직장인 강사 10인에 선발되었습니다. 11월 중에는 시스템을 정비하고, 12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생각입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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