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배고프지 않다

<週刊 태이리> 제27호

by 글쓰는 여행자

저는 ‘스피치라이터(Speech Writer)’입니다. CEO의 말과 글을 쓰는 월급쟁이죠. 연설문이나 기념사, 격려사, 개회사, 그리고 외부에 건네는 축사나 칼럼, 인터뷰 같은 글을 매일 씁니다. 올해 업무실적을 적어내느라 계산해보니 1년에 120개 쯤 됩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꼴로 길게는 6분 내외 2000자, 짧게는 3분 이내의 1100자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몇 개 있습니다.


#1. 스피치라이터의 일

회사에서 글을 쓰는 건 일기나 수필, 소설, 혹은 페북이나 브런치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념식이나 창립기념일, MOU같은 행사 일정은 딱 정해져 있고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초안이 개떡 같아도 어떻게든 찰떡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그 찰떡이 된 개떡으로 팀장과 홍보실장, 비서팀과 현업 실무자까지 모두 조금씩 만족시켜야 하는 게 스피치라이터의 일입니다. 자, 지금부터 잘 들어요.

▲ 스피치라이터는 뜬구름 잡는 글쟁이가 아니다.

제 일에는 사공이 참 많습니다. 어찌 보면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인데, 저마다 입장이 너무 달라서 그냥 듣기만 해도 하루가 다 가고 기운이 쫙 빠집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한 명이라도 건너뛰면, 꼭 그 사람이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머피의 법칙처럼 그 당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오류가 떡하니 발견되곤 합니다. 그러니까 번거로워도 모두에게 묻고 따로 의견이 없으면 ‘없다’라는 말이라도 하시라고 완곡하게 강요해야 합니다. 어차피 세계사에 남을 감동적인 말씀을 쓸 수 없다면, 최소한 누구라도 불만을 품지 않고, 아주 작은 실수 하나도 없어야 하는 게 연설문 쓰는 일입니다. 이건 잘 되면 본전이지만, 그렇다고 엉망으로 쓰면 이번 생의 흑역사가 되고 두고두고 개망신 당합니다.

▲ 이때 스피치라이터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십 개의 허들을 넘어 그분 앞에까지 겨우 간다고 해도 아직 끝이 아닙니다. 스피치의 모든 걸 결정하시는 그분이 ‘No!’라고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은 한 순간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니다. 그분께서 “다시 쓰라”하시면 좀 전까지 제 뒤에서 웃던 분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사실은 여기가 처음부터 좀 이상했어’라는 뻔뻔한 소리도 막 지껄이십니다. 아놔, 이상한 줄 정말 알았다면 미리 말을 하시든가. 스피치라이터로 살다보니 이런 적이 가끔씩 있는데, 그럴 때마다 종로 5가의 매운 낙지볶음과 빨간 두꺼비 소주가 확 땡깁니다.


#2. 그분만 바라보는 극한직업

말씀자료가 한 번에 통과되려면,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그분의 표정으로 회사를 말해야 합니다. 자기 색깔이 지나치게 강하면, 아무리 글 솜씨가 좋아도 견뎌내기 어려운 게 이 일입니다. 어떤 조직에서 연설문을 쓴다는 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내 개성대로 담아내는 글과는 그 시작부터 성격이 다르니까요. 철저하게 나를 지우고, 그분의 캐릭터를 찾아 그분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철저한 ‘을(乙)의 글쓰기’입니다. 보고서, 이메일, 제안서 같은 대부분의 비즈니스 라이팅이 거의 다 비슷하겠죠. 청중이 있고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저는 그걸 써서 그분께서 잘 말씀하시도록 준비해야 니다.

▲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며, 내 흔적까지 지우며 쓴다.

그분께서 너그럽게 ‘OK’하셨다고 너무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뒤로 살짝 물러나 혼자 킥킥 웃으며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기념으로 자기 블로그나 페북에 올린다든지, 내가 썼다고 티를 낸다든지, 너무 맘에 들어서 내용을 미리 공개하면 그 자리가 금세 사라집니다. 스피치라이터는 머리 회전과 손가락이 통장에서 월급이 빠져나갈 때처럼 빨라야 하고 귀는 안테나처럼 열려 있어야 하지만, 입은 부장의 엉덩이처럼 묵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피치라이터를 ‘고스트라이터(Ghost Writ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 바닥에선 일단 글 쓰고 욕 안 먹으면 ‘B+’ 이상은 된다는 뜻입니다.

▲ 내가 써도 내 글이 아닌 걸, 인정해야 한다.

말씀자료가 매번 단칼에 통과돼도 문제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않는단 뜻이거든요. 그게 반복되면 ‘스피치라이터가 꼭 필요해?’ 이런 말이 유령처럼 돌아다닐지도 모릅니다. 스피치라이터는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에 소속된 경우가 더 많은데, 공채가 아니라 전문별정직이거나 무기계약직인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론(無用論)’이 비서실과 인사팀 같은 데에서 들려온다면 위험신호입니다. 칼날을 세워 그분의 평소 말씀을 키워드별로 정리해 놓고, 이것저것 녹취를 깔끔하게 해 두면 언젠가 그게 한번쯤은 자기를 지켜줄지도 모릅니다. 적고 보니, 이거 참 극한직업이네요. 제가 이렇게 삽니다. 늘 경계하면서, 항상 도전에 떠밀리면서.


#3. 엄마가 주신 딱 하나의 재능

이 일을 하면서 또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일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해외 출장 중인 그분께서 어느 날 문득 쓸 만한 이야기가 생각나신다면, 그걸 한 다리 건너 비서에게 전해 듣고 아침까지 칼럼을 써내야 합니다.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에, 이럴 때 역할을 제대로 해내면 ‘역시 전문가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이런 식이면, 만성설사나 귀울림, 디스크, 초조, 불안, 심신장애 같은 직업병에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 강원국 작가는 ‘글쟁이는 모두 관종이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저더러 가끔 “글 쓰는 게 지겹지는 않아?”라고 묻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면 뻥이지만 일단 쓰고 나면 그걸 읽어보는 게 항상 즐거웠습니다. 관심받고 싶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변형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아무도 몰라줘도 그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직접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잘 살펴보면, 제 인생의 조각이 거기 하나쯤은 담겨 있을 수도 있고요. 아니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해도, 그걸 쓰면서 저만의 속도와 감각을 유지할 수 있으니 분명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더 하고 싶은 진짜 제 이야기는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책을 내면 됩니다.

▲ 국문과 나와서 뭐할래, 딱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본다.

글을 쓰다보면 가끔씩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국문과는 굶는 과’라며 전공 선택을 몇 번이나 말리셨죠. 주변에서도 다 그랬고요. 어머니는 제가 전역을 3개월 앞둔 시점에 돌아가셨는데, 마지막까지도 제 걱정만 하셨습니다. 로펌에 다니는 형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누나와 달리, 저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었으니까요. “국문과에 가더라도 절대로 글 써서 밥 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 선생님이 돼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밥벌이도 못할까 걱정이셨던 거죠. 엄마, 걱정 마세요. 아직까진 글 써서 남들만큼 잘 먹고 있어요. ‘스피치라이터’라는 직업이 지구에 있을 거라곤 그때 생각조차 못했지만, 결국 이렇게 딱 찾아냈잖아요. 엄마,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글쓰기란 놈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예요. 요샌 직장인들이 글쓰기를 시간내서 배우는 시대가 됐어요. 혹시 알아요, 다음 책이 대박날지. 아, 다음에 한 권 사달란 이야깁니다. 제발.


▮ 덧붙이는 말 ▮

1. 교육전문기업 휴넷이 오픈한 ‘해피칼리지’에서 직장인 강사 10인에 선발되었습니다. 11월 중에 촬영을 마치고,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강좌를 오픈할 생각입니다. 조금 기대해주세요. 고맙습니다.

2. 엄마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고 싶은데, 아버지를 쓸 때보다 용기가 안 납니다. 소설 <한남동 원주민>에는 조심스럽게 담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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