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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Nov 07. 2018

글쓰기는 배고프지 않다

<週刊 태이리> 제27호

저는 ‘스피치라이터(Speech Writer)’입니다. CEO의 말과 글을 쓰는 월급쟁이죠. 연설문이나 기념사, 격려사, 개회사, 그리고 외부에 건네는 축사나 칼럼, 인터뷰 같은 글을 매일 씁니다. 올해 업무실적을 적어내느라 계산해보니 1년에 120개 쯤 됩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꼴로 길게는 6분 내외 2000자, 짧게는 3분 이내의 1100자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몇 개 있습니다.


#1. 스피치라이터의 일

회사에서 글을 쓰는 건 일기나 수필, 소설, 혹은 페북이나 브런치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념식이나 창립기념일, MOU같은 행사 일정은 딱 정해져 있고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초안이 개떡 같아도 어떻게든 찰떡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그 찰떡이 된 개떡으로 팀장과 홍보실장, 비서팀과 현업 실무자까지 모두 조금씩 만족시켜야 하는 게 스피치라이터의 일입니다. 자, 지금부터 잘 들어요.  

▲ 스피치라이터는 뜬구름 잡는 글쟁이가 아니다.

제 일에는 사공이 참 많습니다. 어찌 보면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것인데, 저마다 입장이 너무 달라서 그냥 듣기만 해도 하루가 다 가고 기운이 쫙 빠집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한 명이라도 건너뛰면, 꼭 그 사람이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머피의 법칙처럼 그 당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오류가 떡하니 발견되곤 합니다. 그러니까 번거로워도 모두에게 묻고 따로 의견이 없으면 ‘없다’라는 말이라도 하시라고 완곡하게 강요해야 합니다. 어차피 세계사에 남을 감동적인 말씀을 쓸 수 없다면, 최소한 누구라도 불만을 품지 않고, 아주 작은 실수 하나도 없어야 하는 게 연설문 쓰는 일입니다. 이건 잘 되면 본전이지만, 그렇다고 엉망으로 쓰면 이번 생의 흑역사가 되고 두고두고 개망신 당합니다.   

▲ 이때 스피치라이터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십 개의 허들을 넘어 그분 앞에까지 겨우 간다고 해도 아직 끝이 아닙니다. 스피치의 모든 걸 결정하시는 그분이 ‘No!’라고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은 한 순간에 아짝에도 쓸모가 없니다. 그분께서 “다시 쓰라”하시면 좀 전까지 제 뒤에서 웃던 분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사실은 여기가 처음부터 좀 이상했어’라는 뻔뻔한 소리도 막 지껄이십니다. 아놔, 이상한 줄 정말 알았다면 미리 말을 하시든가. 스피치라이터로 살다보니 이런 적이 가끔씩 있는데, 그럴 때마다 종로 5가의 매운 낙지볶음과 빨간 두꺼비 소주가 확 땡깁니다.     


#2. 그분만 바라보는 극한직업

말씀자료가 한 번에 통과되려면,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그분의 표정으로 회사를 말해야 합니다. 자기 색깔이 지나치게 강하면, 아무리 글 솜씨가 좋아도 견뎌내기 어려운 게 이 일입니다. 어떤 조직에서 연설문을 쓴다는 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내 개성대로 담아내는 글과는 그 시작부터 성격이 다르니까요. 철저하게 나를 지우고, 그분의 캐릭터를 찾아 그분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철저한 ‘을(乙)의 글쓰기’입니다. 보고서, 이메일, 제안서 같은 대부분의 비즈니스 라이팅이 거의 다 비슷하겠죠. 청중이 있고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저는 그걸 써서 그분께서 잘 말씀하시도록 준비해야 니다.  

 

▲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며, 내 흔적까지 지우며 쓴다.

그분께서 너그럽게 ‘OK’하셨다고 너무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뒤로 살짝 물러나 혼자 킥킥 웃으며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기념으로 자기 블로그나 페북에 올린다든지, 내가 썼다고 티를 낸다든지, 너무 맘에 들어서 내용을 미리 공개하면 그 자리가 금세 사라집니다. 스피치라이터는 머리 회전과 손가락이 통장에서 월급이 빠져나갈 때처럼 빨라야 하고 귀는 안테나처럼 열려 있어야 하지만, 입은 부장의 엉덩이처럼 묵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피치라이터를 ‘고스트라이터(Ghost Writ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 바닥에선 일단 글 쓰고 욕 안 먹으면 ‘B+’ 이상은 된다는 뜻입니다.      

▲ 내가 써도 내 글이 아닌 걸, 인정해야 한다.

말씀자료가 매번 단칼에 통과돼도 문제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않는단 뜻이거든요. 그게 반복되면 ‘스피치라이터가 꼭 필요해?’ 이런 말이 유령처럼 돌아다닐지도 모릅니다. 스피치라이터는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에 소속된 경우가 더 많은데, 공채가 아니라 전문별정직이거나 무기계약직인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론(無用論)’이 비서실과 인사팀 같은 데에서 들려온다면 위험신호입니다. 칼날을 세워 그분의 평소 말씀을 키워드별로 정리해 놓고, 이것저것 녹취를 깔끔하게 해 두면 언젠가 그게 한번쯤은 자기를 지켜줄지도 모릅니다. 적고 보니, 이거 참 극한직업이네요. 제가 이렇게 삽니다. 늘 경계하면서, 항상 도전에 떠밀리면서.   


#3. 엄마가 주신 딱 하나의 재능

이 일을 하면서 또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일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해외 출장 중인 그분께서 어느 날 문득 쓸 만한 이야기가 생각나신다면, 그걸 한 다리 건너 비서에게 전해 듣고 아침까지 칼럼을 써내야 합니다.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에, 이럴 때 역할을 제대로 해내면 ‘역시 전문가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이런 식이면, 만성설사나 귀울림, 디스크, 초조, 불안, 심신장애 같은 직업병에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 강원국 작가는 ‘글쟁이는 모두 관종이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저더러 가끔 “글 쓰는 게 지겹지는 않아?”라고 묻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면 뻥이지만 일단 쓰고 나면 그걸 읽어보는 게 항상 즐거웠습니다. 관심받고 싶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변형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아무도 몰라줘도 그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직접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잘 살펴보면, 제 인생의 조각이 거기 하나쯤은 담겨 있을 수도 있고요. 아니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해도, 그걸 쓰면서 저만의 속도와 감각을 유지할 수 있으니 분명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더 하고 싶은 진짜 제 이야기는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책을 내면 됩니다.

▲ 국문과 나와서 뭐할래, 딱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본다.

글을 쓰다보면 가끔씩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국문과는 굶는 과’라며 전공 선택을 몇 번이나 말리셨죠. 주변에서도 다 그랬고요. 어머니는 제가 전역을 3개월 앞둔 시점에 돌아가셨는데, 마지막까지도 제 걱정만 하셨습니다. 로펌에 다니는 형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누나와 달리, 저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었으니까요. “국문과에 가더라도 절대로 글 써서 밥 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 선생님이 돼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밥벌이도 못할까 걱정이셨던 거죠. 엄마, 걱정 마세요. 아직까진 글 써서 남들만큼 잘 먹고 있어요. ‘스피치라이터’라는 직업이 지구에 있을 거라곤 그때 생각조차 못했지만, 결국 이렇게 딱 찾아냈잖아요. 엄마,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글쓰기란 놈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예요. 요샌 직장인들이 글쓰기를 시간내서 배우는 시대가 됐어요. 혹시 알아요, 다음 책이 대박날지. 아, 다음에 한 권 사달란 이야깁니다. 제발.    


▮ 덧붙이는 말 ▮  

  

1. 교육전문기업 휴넷이 오픈한 ‘해피칼리지’에서 직장인 강사 10인에 선발되었습니다. 11월 중에 촬영을 마치고,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강좌를 오픈할 생각입니다. 조금 기대해주세요. 고맙습니다.     

2. 엄마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고 싶은데, 아버지를 쓸 때보다 용기가 안 납니다. 소설 <한남동 원주민>에는 조심스럽게 담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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