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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Dec 13. 2018

너만 모르는 신년사의 비밀

밖에서도 통하는 직장인의 글

곧 새해입니다. 아직 좀 낯설겠지만 ‘기해년(己亥年)’과 ‘황금돼지’라는 말이 포털을 금세 뒤덮을 겁니다. 그 다음엔 정부와 지자체와 기업과 협회의 신년사(新年辭)들이 쏟아지겠죠. 기다렸다는 듯 그다음 날 저녁에는 <신년사로 본 2019년>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들도 주르륵 나올 겁니다. 이 세상의 많은 분들이 신년사를 그저 새해 떡국처럼 무심하게 받아 보시겠지만, 스피치라이터인 저는 좀 사정이 다릅니다. 이걸 어떻게 써야 할까, 그 고민과 퇴고가 벌써 3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자, 문재인 정부의 올해 신년사를 예측해 봅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두 줄 쯤 시작해서 “지난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국민들은 모두 잘 이겨냈다. 고맙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할 겁니다. 이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복지, 교육을 차례대로 다섯에서 일곱 줄 정도 살펴보다가, 계층과 사회 각 부문 간의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고, 마지막엔 “우리나라를 더 응원하고 더 좋은 나라로 함께 만들어 가자”며 두 줄 정도 애국심을 북돋을 겁니다. 2018년 무술년엔 “평창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자”였는데, 아마도 올해에는 “남북 평화 시대를 만들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조금은 그 결이 다르죠.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을 전년 동기 대비 몇 퍼센트(%)라고 짚어줄 거고, 곧 이어 경쟁자와 시장 상황을 차례차례 분석할 겁니다. 본문에서는 국내외 경영환경을 예측하다가, 몇 가지 당부말씀을 ‘불확실성’ ‘4차 산업혁명’ ‘고객중심’ ‘패러다임 혁신’ 등의 익숙한 단어들과 섞어서 ‘첫째, 둘째, 셋째’로 조목조목 이야기할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노사 간 협동을 더 주문하고, 누군가에게 상(賞)을 주고 다른 누군가에는 벌(罰)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기업은 신년사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 기업은 늘 성장과 혁신을 이야기한다. (출처:CEO 스코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담아 듣지 않을 겁니다. 승패는 여기서 갈립니다. 신년사에서 그 조직의 리더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하는 문제는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다섯 배는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매번 들어온 비슷한 말이라며 지겹게만 느끼시겠지만, 가만 뜯어보면 이건 그저 그런 말잔치가 아닙니다. 리더의 현실인식과 비전을 기획처나 인사처와 같은 여러 유관부서가 수차례 검토하고, 저 같은 사람이 몇 주간 매만지고, 다시 대통령이나 회장, 사장, 시장, 장관들이 종 컨펌해 겨우 내놓는 겁니다.  


#2. 좋은 건 여기서 다 나온다

신년사는 그 조직이 구성원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신년사에는 그 조직의 존재목적과 지금의 위치,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압축돼 있습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여기에 바로 처세술의 핵심이 있고, 승진전략이 있습니다. 출제의도를 알고 문제를 푸는 사람과 이제 막 시험지를 받아든 사람이 똑같은 성적을 낼 수는 없습니다. 조직에는 수십 개의 말씀들이 있지만, 그 말씀 중의 정수(精髓)는, 곧 받아보실 신년사입니다. 이젠 놓치지 마세요.  

▲ 뭘 준비하고 실행할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누구나 자기와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회사는 더 그렇습니다.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시건방진 농담이나 어설픈 아부를 할 때도, 리더가 했던 말을 재치 있게 패러디해야 센스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심지어는 술자리 농담마저도 회사의 분위기와 어울려야 박수를 받는 게 회사입니다. 그때 신년사는 충분히 좋은 소재가 됩니다. 별로 와 닿지 않으실 것 같으니 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신년사에 나온 사자성어(四子成語)라든지 슬로건은 좋은 건배구호가 될 수 있다는 에피소드입니다.   

▲  포스코는 2017년 새로운 비전과 슬로건을 발표했다.

제가 예전에 다녔던 철강그룹에서는 ‘철(鐵, Fe)’ 이외의 새로운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철을 만드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초일류회사로 도약하기 위해 합금, 엔지니어링, 건설, 토목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기업체질을 완전히 바꾸자는 소립니다. 그때 나온 비전슬로건이 ‘새로운 성공신화를 향하여’였습니다. 아주 뻔하고 지겹게 들은 소리죠. 그런데 이게 새롭게 발표된 이후 어느 술자리에서 다들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스Cass' 너무 평범하지 않냐고요. 다시 보세요. 카스는 ‘Creating Another Success Story’의 이니셜입니다. 이런 건배사를 처음 생각해낸 직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신년사에 담겨진 비밀들을 곱씹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3. 좋은 말씀이 세상을 구한다

신년사를 전문적으로 쓰는 일은, 단언컨대 아무나 못하는 특별한 영역입니다. 대통령이나 사장이 ‘야, 이거 이렇게 써!’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면 참 좋겠지만, 스피치라이터가 그분과 절친이라거나 피를 나눈 부모자식 관계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지구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쓸 땐 처음엔 우주 속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막연합니다. 다들 저만 바라보는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겉은 태연해도 제 속은  언제 신호를 보낼지 모르는 등대만 바라보는 열 살 고아의 심정이 됩니다.

▲ 미리 알고 신년사 쓰는 경우는 없다. 써야 알게 된다.

말씀을 쓰는 첫 걸음은, 치아처럼 가지런하게 쌓인,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각 부처의 업무보고 자료를 겸손한 자세로 탐험하는 겁니다. 어떤 놈을 앞에 두고 뭘 뒤에 놔야 할지 가치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게 경험이 많을수록, 그 확률이 높아지는데 저는 아직 매번 주저합니다. 그 다음엔 나름대로 정돈한 자료들을 문맥과 패턴에 맞게 배치해봅니다. 사람들이 은연중 기대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말들부터 적고 그 사이사이를 중점현안과 경영분석, 그리고 그분의 캐릭터로 채웁니다.

▲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회사엔 신년사가 있다.

저는, 일단 최선을 다해 작성했다면 자신감을 갖고 욕을 먹더라도 빨리 보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고칠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홍보실장, 비서실장이라는 사공을 무사히 통과해 최종 보스인 그분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 이건 아닌데…’라는 말이 나오면 실망하지 말고, 몇 번이고 다시 쓰면 됩니다.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신년사는 늘 막판까지 고치기 일쑤라서, 크리스마스 날에도 야근을 한 적이 종종 있어서 힘이 듭니다. 못해 먹겠다가도 그분께서 제가 드린 말씀을 얼마 고치지 않고 이야기하시면 말로 못할 희열이 느껴지니 계속 하고 있습니다. 뭔가 세상을 구한 것 같은, 막 그런 엄청 통쾌함. 잘 모르셨겠지만, 신년사는 이렇게 안간힘을 다해 씁니다.    


덧붙이는 말  


이 내용은 책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로 출간되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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