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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Sep 25. 2020

벽화를 그리며 남미 여행, 첫 번째

Lima, Peru

여행을 하면서 배운 여럿 중 하나는 비싸면서 안 좋은 것은 있지만 싸고 좋은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싸고 적당히 나쁘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가장 편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싸고 좋은 것’을 쫓다 보면 언제나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파리의 한 호텔에서 급하게 리마에 머물 숙소를 알아볼 때도 이 게스트하우스의 5달러란 저렴한 가격과 100%에 가까운 평점은 예약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리뷰들을 살펴보니 칭찬은 한결같았다. 엄마 같은 아나 아주머니에 대한 칭찬뿐. 다른 이유 때문에 높은 평점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다른 숙소로 향했겠지만 ‘도대체 어떤 주인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이틀 치 방값을 결제하고 리마 행 비행기를 탔다.


아나 아주머니가 미리 공항으로 보낸 택시를 타고 해가 지고 나서야 호스텔에 도착했다. 경적을 살짝 울리니 굳은 철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얀 아주머니가 웃으며 나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세열 씨죠? 내 이름은 아나예요.”

아주머니는 포근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그리고 함께 2층으로 올라 차분하게 게스트 하우스를 안내해주었다. 그녀의 작지만 따뜻한 목소리는  ‘남미’라는 장소에 한껏 긴장해있던 한 여행자를 편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 많은 리뷰들이 왜 아나 아줌마를 한결같이 칭찬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다음날 이곳의 아침이 참 좋았다.

큰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서 아나 아주머니가 챙겨주는 아침밥이 좋았고 먼 도시에서 도착한 여행자들과의 수다가 좋았다. 그렇게 한가롭게 아침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새 시차의 피로감을 못 이기고 다시 잠들어버린다. 


결국 오후 늦게 일어나 남들 다 잘 시간엔 말똥말똥해진다. 결국 노트북을 들고 식당에 나왔다. 그때 아나 아주머니도 식당에 올라와 내일 아침 준비를 미리 한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간단히 일을 마친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과 함께 사는 커다란 개 마르띠요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여러 장의 사진을 넘기면서 이전에 그렸던 벽화 사진을 그녀가 관심 있게 바라본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나, 여기에도 그림 한번 그려볼까요?”


사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저 하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묻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서 몇 번 거절을 당했던 기억에 망설일 수밖에 없다. 낯선 손님에게 벽을 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졸였던 마음에 비해 아나 아주머니는 너무 쉽게 대답한다.

 “당연하지. 그림은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도 좋아.”





아나 아주머니의 시원한 허락 덕분에 다음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펜을 꺼내 일렬로 늘어놓고 무엇을 그릴까 고민한다. 그리고 참고 사진과 딛고 올라갈 의자를 가져다 놓고 나서야 준비를 마무리한다.

언제나처럼 벽 앞에 서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그리고 손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려보고 나서야 벽에 가는 첫 선을 그린다.

그 선 하나가 다시 전체 그림의 크기를 결정해주고 위치를 잡아준다. 실수를 하면 실수처럼 안 보이게 다음 선을 그리며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간다. 그렇게 흰 벽은 서서히 리마의 광장과 나스카 라인들로 채워져 간다.


“와우! 멋지네!”

슬슬 밖에 나갔던 여행자들이 돌아오고 그림을 봐준다. 사람들의 소리에 아나 아주머니가 일층에서 올라오셨다.

언제나 이 시간이 가장 긴장된다. 주인의 첫마디, 그리고 표정.

아주머니는 천천히 그림을 바라보면 다가오시더니 입을 열었다.

“너무 예쁜데! 이곳이랑도 너무 잘 어울리고!”

그리고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다.

이렇게 게스트하우스의 첫 번째 벽화를 그렸다.




며칠 후 리마를 떠나는 날, 아나 아주머니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주셨다. 그리고 며칠 전 맛있다고 말했던 라면과 빵을 챙겨 봉투에 담아 주신다. 아침을 먹고 그 봉투를 가방에 꼭꼭 담아 떠나 준비를 마무리했다.


“아나 방값 계산할게요.”

나는 지갑을 들고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니야. 벽화도 그려줬잖아. 내가 더 잘 챙겨줬어야 하는데 미안해.”

“아나 조금이라도 받아요. 내가 아나한테 받은 것도 참 많잖아요!”

“안돼. 그럼 내가 불편해. 벽화 정말 고마워. 내가 호스텔 그만둘 때까지 저 벽화 간직할 거야.”

그렇게 아나는 며칠 동안 먹고 잔 값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큰길까지 따라 나오셔서 택시를 잡아 준다. 우리는 서로 마지막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세열, 항상 건강하게 여행해! 소매치기들 조심하고!”


멀리서 아나 아줌마가 오래도록 손을 흔든다.
 



 

“벽화를 보면 네가 여기 머물렀던 짧은 시간이 떠올라. 사람들이 이 그림 그린 사람에 대해서 물어볼 때마다 난 참 자랑스럽지.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너에 대해서 그리고 네가 여행을 하며 곳곳에 그려놓은 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줘. 특히 한국 사람들이 네가 그린 벽화 앞에서 사진 많이 찍어 가더라! 항상 행운이 함께 하길. -아나.”


(리마를 떠나고 몇 달 후 아나에게 받은 페이스북 메시지)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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