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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Sep 29. 2020

생강과 여행

South America

사소한 물건이 있다.

지난 여행의 정확한 어느 시점과 장소로 나를 빠져들게 하는,

때론 대단하지 않았던 장소를,

너무 평범했던 일이라 평소에 잘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을,

들춰내는 사소한 물건이 있다.


이를테면 지갑 속에서 나온 오래된 버스 티켓이나 

충동적으로 사다 놓긴 했지만 도무지 누굴 줘야 할지 모를 기념품.

그리고 음식이나 식재료 같은 것들도.



갑자기 서울에 가을이 찾아온 것만 같은 날, 어머니가 시장에서 생강을 한 봉투 가득 사 오셨다. 아마 며칠 전 목이 칼칼해서 생강차를 마시고 싶다고 흘렸던 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생강차 끓여드릴게요.”

괜히 죄송한 마음에 검은 봉지에서 생강을 한 덩어리 집어 들면서 말했다.  찬물로 생강에 뭍은 흙을 씻어내고는 익숙지 않은 칼질로 두껍게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고 잘게 저미니 노란 즙이 도마 위로 베어 나오고 달달 쌉싸름한 생강 내음이 올라온다.


“그렇게 잘게 썰 필요 없어 나중에 건져 내기 힘들잖아.”

사실 너무 두껍게 깎은 생강 껍질로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것에 싫은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미 잘게 썰어버려 어찌하지 못하고 냄비에 저민 생강을 털어 넣곤 물을 한 가득 부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멍하니 냄비를 쳐다보니 물이 보글보글 끓으며 노랗게 물든다.

그리고 나도 잠시 지난 여행의 기억으로 물든다.





“잉카, 왜 그래?”


함께 볼리비아 우유니를 여행했던 핀란드 친구 잉카를 수크레에서 다시 만났다.

약속하진 않았지만 둘 다 수크레에서 잠시 여행을 멈추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함께 만나 점심을 먹고 가끔은 저녁 시간 바에서 만나 어두운 촛불 아래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볼리비아 전통 게임을 하곤 했다.


스페인어 수업이 없던 날, 잉카의 수업이 끝날 시간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비둘기를 몇몇 아이들이 쫓았다. 갑자기 날아드는 비둘기 떼에 나처럼 할 일 없이 멍하니 휴식을 취하던 어른들은 깜짝 놀라 짜증스럽게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래도 어쨌든 햇살 좋은 여유로운 날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은 때에 잉카는 온몸을 옷과 목도리로 돌돌 싸매 곤 코를 훌쩍거리며 나타났다. 그렇게 춥지 않던 날인데, 게다가 학원 쪽이 아닌 숙소 쪽에서 오니 의아해 물었다.

“잉카, 왜 그래? 아파?”

“응. 감기에 걸린 거 같아. 그래서 학원도 못 가고 쓰러져있다가 간신히 나왔어.”

잉카는 힘겹게 대답했다.


“그냥 메일 보내지 왜 이렇게 무리해서 나왔어?”

“그래도 약속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말해야지. 멀지도 않은 거린데.”

“밥은 먹었어? 얼른 밥 먹자.”

“세열아 미안, 밥도 못 먹겠어.”

잉카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은?”

“먹었는데 잘 안 듣네.”

“일단, 일어나자. 내가 생강차라도 끓여줄게. 감기에 엄청 잘 들어.”

약이면 충분하다는 잉카를 억지로 이끌고 우리는 광장 옆 시장에서 생강과 라임과 설탕을 사 들고 그녀가 머물고 있던 호스텔 갔다. 햇빛이 잘 드는 잔디밭에 잉카를 앉혀 놓고는 공용 주방에서 생강차를 끓였다. 그리고 생강차를 가득 담은 컵에 라임을 흠뻑 짜 넣고 그녀에게 건넸다.





“벌써 낫는 기분이네. 그라시아스.”

몇 모금 마시곤 잉카가 조금 전 보다 나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도 한 모금 마셔 보고는 약간의 실수를 고백했다.

“잉카 미안. 생강이 너무 부족했네. 생강차가 아니라 라임 차 같아. 여기 남은 생강 있으니까 다음엔 조금 더 넣어서 끓여봐.”

“아냐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 라임도 많이 넣었으니 곧 나을 거야.

 그런데 원래 한국에서도 이렇게 자주 끓여먹어?”

아직 식지 않은 머그 컵을 양손에 쥔 채 잉카가 물었다.

“아니 나도 여행 나와서 처음 끓여봤어.”

“정말? 누가 이런 걸 알려줬어?”

“우리 같이 우유니 여행했던 여진 누나 알지? 그 누나가 페루에서 알려줬지.”





몇 달 전 페루에 막 도착했을 때, 거긴 남반구라서 추울 거야 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리마는 한 여름이었다. 억지로 챙겨 온 두꺼운 점퍼는 짐스러웠고 귀찮았지만 고산도시 쿠스코에 막 도착해서야 이걸 챙겨 와서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갑자기 높아진 고도와 찬 바람 때문에 이곳의 여행자들은 가벼운 고산 증세와 감기 증세를 함께 앓아 다들 콜록대거나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가벼운 고산 증세에 몽롱해하며 기침을 하고 있을 때 여진 누나를 이 곳에서 만났다.


“우리 생강 사서 생강차 끓여 먹자.”


누나는 시장에서 생강을 몇 알 사 왔고 익숙한 솜씨로 생강을 다듬고 냄비 한 가득 차를 끓였다. 

우리는 냄비를 통째로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창가에 앉아 몇 시간이건 한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특유의 매운 생강 향이 목을 타고 넘어와 온몸으로 퍼지며 잔기침을 잠재워줬다.

그렇게 커다란 머그 컵을 움켜 쥔 채 함께 깔깔대며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하고 또 하거나 각자 노트북으로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외국 친구들이 오면 한잔씩 덜어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곳에서 한날은 다른 차를, 한날을 생강차를 마시며 갑자기 찾아온 겨울, 아니 겨울만큼이나 추운 도시로 찾아온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때 페루에서 여진 누나에게 생강차를 끓이는 법을 배우고 몇 달이 지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와서야 드디어 적절하게 생강차를 끓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종종 “생강차 드실 분 계신가요?”라고 물으며 사람들에게 생강차를 대접했다.  여진 누나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엄지손가락 만한 작은 조각 하나로 여러 명이 함께 마실 수 있으니, 매번 생강차를 끓일 때마다 마법을 부리는 기분이다.

누구는 설탕을 넣어 마시고 누구는 라임을 넣어 마시고 누구는 밑에 남은 생강까지 씹어 먹었다.

쿠스코에서 그랬던 것처럼 생강차를 다 마실 때까지 함께 이야기했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으면 아낌없이 차를 권했다.


이렇게 남미를 여행하는 내내 생강차를 누군가와 함께 마셨고 그 생강차를 끓일 때마다 생강차를 처음 만들어 줬던 여진 누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남미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가 몇 번의 전송 실패 끝에 힘겹게 한 문장을 전했다.


‘아프니까 네가 끓여준 생강차가 생각난다.’


그래서 여전히 남미 특산품이라는 옥수수도 감자도 아닌, 너무 사소해서 사진 한 장 찍어 놓지 않은

‘생강’때문에 오래도록 남미가 떠오른다.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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