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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Sep 04. 2020

같은 곳을 한번 더 여행한다는 것

Siem Reap, Cambodia


같은 곳을 한번 더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


  짜증이 났다. 이젠 앙코르 유적 여기나 저기나 모두 똑같은 돌덩어리들로 보일 정도로 지쳐 버렸다. 그리고 땀에 흠뻑 젖어 버린 셔츠, 달려드는 벌레, 뜨거운 햇살, 이미 미지근하다 못해 뜨거워져버린 물. 짜증을 내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중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가는 곳마다 달려드는 아이들이었다. 사고 싶지 않은 물건들을 웃으며 거절하다가도 계속해서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굳은 얼굴로 “나중에!”라고 이야기했고 아이들은

  “나중엔 학교 가야 된다고요!”

  거짓말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며 나를 가로막고 더 떼를 쓴다. 그래도 어쩌나. 나는 툭툭을 타고 이곳을 떠나면 그만인데.


  툭 툭 툭, 소리를 내며 툭툭이를 타고 다시 다른 장소에 내린다.



 


 “미스터!, 물? 팔찌? 엽서? 싸요!”

  또다시 달려오는 아이들, 조금 전 떠나면 그만이란 건 착각이었구나.

  “나중에!”

  다시 아이들에게 건성으로 말을 던졌고 아이들이 대답했다.

  "다들 나중에라고 말하고 절대 나중엔 돌아오지 않죠.”


  해가 져가는 시간. 이제 아이들의 영업시간도 끝날 무렵이라 그런지, 별다른 집착 없이 차갑게 대답하며 나로부터 멀어진다. 후련함과 묘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런데 그중 한 녀석이 끝까지 따라와 내 손목을 잡으며 나무를 엮어 만든 팔찌를 채워준다.

  “이건 선물!”


  이것도 어차피 아이의 상술이란 생각에 도로 팔찌를 빼서 돌려 주려 하지만 그 소녀는 끝까지 선물일 뿐이라고 우긴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이 그늘 아래 앉아 쉬는 곳까지 따라와 옆에 함께 앉았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왕의 목욕탕이었을지도 모를 ‘쓰랑쓰랑’이라는 이야기와 시원한 맥주도 살 수 있다는 말을 교묘히 섞어가며 우리를 설득했다. 그런 그녀의 부탁에 가까운 설득과 갈증 탓에 결국 우린 맥주 두 캔과 엽서와 얼음물을 주문해 버렸다.





  아이는 가게로 뛰어가 우리가 주문한 것들을 가져다주었고 다시 우리 옆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 재잘댔다.

  “너 이름이 뭐니?”

  “’야’에요.”

  “야. 넌 여기 앙코르에서 최고야. 뭘 안 살 수가 없게 만드네.”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야기했다.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고 나니 그동안 쌓여있던 짜증이 풀리고 웃으며 말할 여유를 되찾았다. 으쓱하는 야의 모습이 이제야 귀여운 꼬마로 보인다. 그래서 카메라를 살짝 들며 야에게 물었다.

  “사진 찍어도 되니?”

  “물론이죠!”

  야는 포즈를 취하고 셔터 소리가 나자마자 저 멀리 다른 툭툭이 멈추는 곳으로 곧장 뛰어간다. 한번 뒤돌아 안녕!이라고 외치곤. 우리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각자 쥐고 있던 얼음물과 맥주를 마저 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일 년 후 다시 동남아에, 그리고 앙코르 왓의 도시 씨엠립으로 왔다. 이번에는 칼라 티와 청바지 대신 조금 헐렁한 바지에 편한 티셔츠를 입었고 툭툭 대신에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 낡은 가이드북 사이에 지난번 찍었던 야의 사진을 넣어왔다. 여전히 이곳은 덥고 셔츠는 젖어 버렸으며 벌레들은 달려들었다. 그리고 물도 미지근해져 버린 지 오래. 대신 자전거를 타며 불어오는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젖은 셔츠 사이로 들어왔고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목을 축일 수 있는 나무 그늘과 여유가 있었다. 툭툭을 탈 때는 느끼지 못한 풍경이다.


  앙코르 유적 매표소를 지나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어느새 앙코르 왓에 도착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자물쇠로 묶어두기도 전에 역시나 아이들이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달려온다.

“미스터!, 물? 팔찌? 엽서? 싸요!”

  여전히 비슷한 물건과 비슷한 가격으로 아이들이 물건을 팔아보려고 애를 쓴다. 이번엔 찡그린 얼굴로 ‘필요 없어.’ 나 ‘나중에’라는 말 대신 가이드북 사이에서 ‘야’의 사진을 꺼냈다.

“너희들 혹시 이 아이 아니?”

“어! 내 친구예요!”

  주위로 몰려왔던 아이들은 책 사이에서 나온 친구의 사진을 보고는 엽서를 사라는 말 대신에 야에 대한 이야기만 쏟아낸다. 어딜 가나 여전히 매번 아이들이 몰려왔고 그때마다 나는 야의 사진을 꺼내 물었다. 아이들은 모두 야의 학교 친구라 했다. ‘나중에 학교 가야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나중에 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이구나.


  내가 야를 찾고 있다는 소식은 자전거 속도보다도 빠르게 퍼졌다. 오후가 되자 사진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들은 나를 알아보고 ‘너 야 찾고 있지.’라고 아는 체한다. 덕분에 덩달아 녀석들과 함께 친구가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괜히 작년에 아이들이 달려올 때마다 귀찮은 듯 내쫓던 기억이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해질 무렵, 마지막으로 야를 만났던 쓰랑쓰랑으로 페달을 밟아 달리는데 저 멀리 하늘에 커다란 무지개가 피어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앙코르 유적은 짜증과 더위보다는 다음엔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 라는 기대감이 더 컸던 곳이구나. 들렀던 한 곳 한 곳이 유적의 모습보다는 아이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쓰랑쓰랑에 도착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탓인지 관광객들은 모두 돌아갔고 물건을 사라고 달려드는 아이들도 없다. 그저 횅한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쉬운 한숨만 내뱉는다.

  “너무 늦게 왔나 봐.”

  “아쉬워서 어떡해?”

  “괜찮아. 그래도 이 사진 덕분에 하루 종일 즐거웠어.”

  함께 온 친구가 위로를 해주었고 나도 애써 괜찮은 척한다.

다시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는데 가게를 막 정리하던 한 아주머니가 나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야의 사진을 들고 가 ‘이 아이를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딸이데!”

아주머니는 딸의 사진을 들고 있는 낯선 여행자를 경계하는 대신에 우리를 가게 바로 뒤 편 마을로 데려갔고 야를 큰 소리로 불렀다. 곧 야가 집안에서 나왔다. 그렇게 야를 일 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생각만큼 반가워하지 못했다. 야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녀의 모습은 사진처럼 장난기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느새 수줍은 아가씨가 되어버린 탓이다.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찾은 사람이 너구나.”

  그래도 내가 하루 종일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이미 지문이 가득한 사진을 건네니 작년 그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흠뻑 지어준다.

  “고마워. 네가 기억은 안 나지만 여기까지 다시 사진을 가져다주러 와서.”



사진 안상준



  곧 온 가족이 모였고 동네 꼬마 아이들도 낯선 손님들을 반겨주었다. 아이들은 물건 사라는 말 대신에 우리들에게 매달리고 장난을 쳤다 함께 사진을 찍고 야의 통역을 통해 어른들과도 뜨문뜨문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야의 어린 동생 들은 집안에서 작은 기념품들을 들고 나와 우리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작년 야가 선물이라며 작은 나무 팔찌를 손목에 채워준 것처럼. 작은 선물이었지만 아이들이 이 기념품을 팔려고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기에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내일도 다시 올 거지? 내일은 저녁 먹고 가. 미리 준비해둘게. 괜찮다면 여기서 자고 가도 좋아!”

  야네 가족들은 갑자기 찾아온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우리를 초대했다.

  “미안해. 벌써 내일 여기 떠나는 버스표를 사버렸어. 내년이라고는 말 못 하지만 언젠가 다시 꼭 찾아올게. 오늘 찍은 가족사진 들고. 그땐 오늘처럼 기억 못 하지 말고! 그리고 이번에 못 먹은 밥도 먹고 갈 거야.”

  생각지도 못한 초대에 잠시 들떴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 아쉬워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미 어두워진 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앙코를 유적을 빠져나왔다.





  같은 곳을 한번 더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

처음 찾아간 곳은 낯선 도시일 뿐이고 여행자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는 조금 익숙한 길을 따라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된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는 잊고 있던 먼 곳의 친구가 문득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기억이 만들어진다.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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