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tian, Laos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오래 버스를 타고 온 피로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돼서야 일어났고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들을 하나하나 풀고 샤워를 했다. 미지근한 물로 늦잠의 나른함을 흘려보내고 살짝 젖은 수건으로 대강 물기를 털어냈다. 속옷부터 하나하나 다시 챙겨 입고 양말까지 신고 나서야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은 실 팔찌들을 손목에 다시 묶었다. 한쪽은 입으로 물고, 다시 한쪽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그렇게 마지막 외출 준비를 마무리했다.
너무 게으르게 하루를 시작한 탓에 버스표를 알아보고 허름한 박물관 한 곳을 잠시 들렀을 뿐인데 어느덧 웬만한 곳들이 모두 문 닫아 버렸다.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그저 걷는 것 외에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저 멀리 작은 탑이 보인다. 사거리에 설치된 이정표가 저곳이 ‘탓담’이라 말해준다.
탑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겉 보기엔 별다른 감흥 없는 그저 오래된 탑일 뿐이었다. 그래도 다른 곳을 찾아 더 걷기엔 지쳐버려 거리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스케치북을 열었다. 탑 꼭대기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나간다. 삼분의 일 정도나 그렸을 때 인가,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비가 내리지 않을 계절이라 생각했기에 금방 그치려니 했지만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졌다. 적당히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둘러보니 아직 열지 않은 레스토랑이 보였다.
얼른 뛰어가 대문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했지만 비는 더 거세졌고 이 곳도 비를 피하기 부족해 허락 없이 레스토랑 마당을 가로질러 처마 밑까지 들어가 비를 피했다.
멍하니 떨어지는 비를 쳐다보다가 레스토랑 안쪽을 살짝 쳐다보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레스토랑에서 한 웨이트리스가 와인 잔을 정리하며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얀 블라우스와 라오스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빗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쳐버렸다.
나는 급하게 눈을 피했다가 다시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비에 젖어가는 외국인이 애처로웠는지 살짝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동안 본 적이 없는 라오스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주눅이 들었다. 역시나 분위기에 맞게 커피 한잔 값도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는 가격이다. 메뉴를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는 “그냥 비 그칠 때까지 쉬었다 가도 좋아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도 손님이 없는 시간에 찾아온 낯선 외국인이 귀찮지만은 않았는지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며 띄엄띄엄 짧은 영어로 먼저 말을 걸어왔고 우리는 단어로 그림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편안한 마음에 메뉴를 다시 둘러보니 다행히 비싸지 않은 커피가 보여 그녀에게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살짝 얼었던 몸이 따뜻해진다.
여전히 밖은 계속해서 비가 내렸고 그녀는 나 때문에 잠시 멈춘 오픈 준비를 했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스케치북을 열어 조금 전 그리던 탓담 대신에 레스토랑을 그렸다.
그림을 완성할 즈음 비는 어느새 멎어있었고 해는 져있다. 레스토랑에 손님이 거의 가득 차 더 이상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었기에 자리를 정리했다.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는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가는 거예요?”
“네 비가 그쳤으니 돌아가야죠.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A에요.”
그녀는 짧게 이름을 대답하며 ‘잠시만’하는 손짓을 하고는 새로 들어온 손님들에게 자리를 안내하러 간다.
조금 전 그린 그림 한 귀퉁이에 ‘오늘 친절을 베풀어 줘서 고마웠어요. A.’라고 짧게 인사를 쓰고는 테이블에 두고 일어났다. 바쁜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멀리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 했지만 그녀는 애써 급하게 입구까지 따라 나와 인사했다.
“안녕. 내일 다시 봐요.”
하지만 하필 그날 밤부터 심한 열과 배탈이 나 내일 다시 들르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앓다가 그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몸이 조금 나았다. 이제 라오스를 떠나는 버스표를 끊고 다시 인사를 하러 A가 있던 레스토랑으로 갔다. 몇 시부터 일을 시작하는지, 오늘도 나올지 몰랐지만.
다행히 레스토랑 근처에 들어섰을 때 마당을 정리하던 A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크게 불렀다.
테이블 대신에 바에 걸터앉아 다시 제일 싼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의 애매하고 여유로운 시간에 앉아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서로 대화는 수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렵지만은 않았다.
“내일 비엔티안을 떠나요.”
여행 이야기를 하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냐는 물음에 대답했다. 왜 이렇게 짧게 있다 가냐며 아쉬워해줬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A는 지난번처럼 배웅해주다가 내게 물었다.
“첫날부터 궁금했던 건데 이 팔찌들은 뭐예요?”
“아 이거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도시마다 팔찌를 하나씩 사서 묶고 있어요. 그리고 한 번씩 풀고 다시 묶을 때마다 그 도시에서 지낸 시간과 사람들을 떠올리죠.”
나는 팔찌 하나하나씩을 가리키며 그것들을 산 도시 이름을 말했다.
“비엔티안은 어떤 건데요?”
“아쉽지만 비엔티안은 없어요. 팔찌 파는 곳을 못 찾았거든요.”나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다른 곳을 기억할 때 비엔티안 만 빼놓고 기억하겠네요. 그건 안돼요.”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 손짓을 하더니 살짝 젖은 자신의 하얀 실 팔찌를 풀러 내 손목에 묶어준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게 당신의 비엔티안이에요. 한국 돌아갈 때까지 건강하길. 안녕.”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