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울 Mar 05. 2024

이윽고 다정한 외국어

유럽에서 생각한 것들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첫 째로 해야할 일은, 아마 그곳의 언어를 체득하는 일이 아닐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언어적 능력만 갖추는 것보다, 그 언어를 표현하는 맥락, 그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다.


엄청나게 많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영어권 국가도 있었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도 있었으며, 영어와 모국어를 적절히 섞어 소통하는 곳도 있었다. 영어권 국가가 아니더라도, 요즘은 번역기 같은 기술이 좋아서 어려움이 없다고 많이들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낯선 아시아인들을 보고도 대뜸 모국어를 들이미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표현들은 주로 외워두는 편이다. 또 그런 표현을 아는 게 더 즐거운 여행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말이다.

가장 유용한 단어 세개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주로 요 세 가지다. 주로 사용하는 장소는 계산대. 작지만 언어를 배우기 중요한 무대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안부를 묻는 말이나, 필요한 물건에 대한 정보나 위치를 물어볼 수도 있다.


첫 여행지는 독일. 언젠가 독일에 놀러가고 싶어 작년에 교양 수업으로 초급 독일어를 들었다. (그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독일어를 배우기 전에는 딱딱하고 어려운 언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 배우면서도 어느정도는 그렇구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매력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독일어를 들으면 좀 지적인 이미지가 든다고 할까.

독일어는 배우기 어렵다는 이미지에 걸맞게 실제로 어려웠다. 좋은 교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교수님의 발음은 내가 생각한 표준 독일어보다는 좀더 한국적인 발음 같았고, 독일어에서는 'the'를 16개로 나누어 상황에 따라 쓴다는 사실이 나를 낙담시켰다. 하지만 배우면서 '언젠가 이 말을 쓸 일이 오겠지?'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단어를 외우고 입으로 반복했던 일이 즐거웠다. 특히 독일어는 발음이 정직하다.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 대부분 정답이다. 발음이 예외가 있는 경우가 별로 없어 그런 건 맘에 들었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쓴 말은 '할로-당케쉔-츄스' 이 세가지다. 그리고 독일에서 배운 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은 'Genau', 영어로 'Exactly' 같이 맞장구를 치는 단어다. 사촌누나가 이런저런 대화에서 Genau~를 쓰는 걸 보고 나도 자연스럽게 써보고 싶어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말할 때면 신난다. (왠지 Get now~ 같이 들리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Genau를 끼어 말하면 나도 왠지 벨린 사람들에 잘 섞인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다.


네달란드어는 독일어와 비슷했다. 안녕하세요는 호이, 안녕히 가세요는 두이/하이두, 감사합니다는 당큐 벨. 아인트호벤에 사는 내 친구가 알려준 말들이다. 아인트호벤 근처에서 나고 자란 친구 덕분에 편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식당이나 바에 갈 때마다 직원들이 더치가 아니라 영어로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내 친구는 누가 봐도 네덜란드 사람인데? 동양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서 관광객인줄 알았나? 아무리 봐도 내 친구는 네덜란드 사람 같은데 왜 영어로 말을 걸지.. 그런 궁금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아인트호벤은 관광인가, 도시 산업인가 때문에 외국인들이 많아서 처음 말을 걸 땐 영어로 물어보는 게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친구가 알려줬다.

이 친구와는 한국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다. 서울에서 같이 놀며 알려준 단어 중 '흐잘레'란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친구에게 '나 아직 너가 알려준 거 기억하고 있어!'하며 말해주었다. 바에서 다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Gezellig'의 뜻이 뭐냐고 친구한테 다시 물어봤는데, '그냥 이렇게 우리처럼 편하게 노는 거야! cozy하게!'라고 말했다. 알듯 말듯한 단어였다. 한국어로는 딱히 한 단어로 번역되지 않는 그런 말.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더치로만 할 수 있는 말은, 여기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나중에 찾아보며 '흐잘레는 추운 겨울 오후 따듯한 카페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라는 표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론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과 편안한 분위기를 나누는 게 흐잘레라고 느꼈다. 무엇보다 흐잘레~ 하고 단어를 반복하면 왠지 포근해진다. 아인트호벤에서 보낸 편안한 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다.


언젠가부터 영어 말고 다른 언어를 배운다면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작년에 독일어와 함께 초급 프랑스어 수업도 들었다. 완전히 낯선 언어를 편하게 말하기는데 한 학기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다. 한 학기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내게 남은 건, 프랑스 단어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간단한 문장을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꽤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어 발음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배우는 일과 말하는 일 모두 즐거웠다. 다만 프랑스어는 단어를 읽는 게 까다롭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단어를 읽는 법이 영어와도 크게 다르기 때문에 모든 단어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론 보통 맞다고 생각하는 쪽이 틀린다.

+) 대학교 새내기 때 만난 프랑스 친구가 알려준 단어 중에 '아룽지'라는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Let's go!'란 뜻인데, '아룽-지'하고 발음하는 투가 귀엽고 부드러워서 좋아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볼 때 한국어는 동글동글 귀여운 느낌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다. TV에 나온 어떤 외국인 은 '여유'라는 단어 발음이 그 뜻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서 좋다고 했었고, 어떤 외국인은 '사랑'이란 말이 특별해서 제일 좋아한다고 했었다.

흠.. 그럼 난 무슨 단어가 제일 좋았더라?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단어들을 떠올리고 입으로 발음해보았다. 여~유~.. 사랑!.. 기쁨^^... 햇빛**.. 좋은 단어는 많지만 딱 내 단어 같은 기분은 안 들었다.

한번은 책을 읽을 때였던가, 영화를 보다가 그랬나, '다정하다'란 말에 꽂혔다. 다정(多情)하다.. 너무 흔한 말이라 한 번도 좋구나 하고 멈춰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왠지 그땐 그 말이 사실 굉장히 좋은 말이구나 싶었다. 누군가가 '다정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몸 구석구석이 따듯함으로 가득찬 폭신폭신 인간 같다고나 할까. 좋다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자니 한계가 느껴지지만, 나만이 느끼는 '다정함'이란 단어의 힘은 꽤 강력하다. 그래서 난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을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누군가 나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해주면 최고의 칭찬 같이 느껴지곤 한다. 내가 다정한 사람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매거진의 이전글 헤어짐에 능숙해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