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지인은 여행자를 흉내내고, 여행자는 현지인이 되려고 할까?
한동안 몽롱하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행의 막바지다. 이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날이라고 한다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토록 떠나는게 아쉽다니. 여행자의 특권이자 운명이라 한다면 이렇게 떠나는 일을 반복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테다. 한동안은 친구와 떠들고 즐기는 일에 몰두해 글로는 거의 적어두지 못했다. 지금은 오랜만에 카페 야외자리에 앉아 a와 전화를 마치고 일기를 적고있다. 이곳은 내가 꿈꾸던 그런 곳이다. 이국적인 말들이 허공을 맴돌고 조금은 춥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단순한 풍경을 보는 일이 설레고, 담배연기와 강한 향수 냄새가 가득 거리를 메운 곳.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줌 회의를 끝내고 다시 한숨 푹 자고선 오랑주리에 다녀왔다. 모네의 그림을 실제로 몰 줄이야. 어제는 오르세에 다녀왔다.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큰 홀을 보고 초등학생 때 왔던 기억이 어렴풋 되살아 났다. 그땐 모네의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지루하고 힘들기만 해서 의자에 앉아있던 기억 뿐인데, 이제는 그림 하나하나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어제와 오늘 미술관에서 여러 그림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오늘은 혼자 다녀왔는데, 기다리는 사람없이 하염없이 앉아 그림을 구경하고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기분이 꽤 상쾌해졌다. 그리고 또 오늘은 어제 새로 산 라코스테 가디건을 입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떴다.
그림을 보다보면 캔버스 위에 선을 긋고, 색을 입히고, 풍경을 보았을 작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 오랑주리에서 본 모네 수련 연작은 유리막도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 그 붓칠을 보며 모네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백년 전 모네와 같은 위치에 서서 수련 하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림은 알려주지 않은 그 날의 모든 것을 상상한다. 그날의 바람은 어땠을까. 쨍쨍 해가 비치는 여름 낮이었을까?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그림을 보았을까? 오랑주리는 모네의 의도대로 자연광이 들어오는 원형의 흰벽으로 된 공간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Meditation을 위한 공간. 한참이나 앉아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지저분한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림에 흥미를 잃으면 이제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와 대화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할 것 같은지. 그런 것을 궁금해한다.
오랑주리를 나서니 비가 추적추적 땅을 적시고 있었고, 나는 그 날씨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똑 닮아 마음에 들어 모자도 우산도 없이 걸었다. "Paris is most beautiful in the rain." 좋아하는 말 속에 들어왔다. 파리는 곳곳이 영화같다. 실제로 영화에 나온 곳들이기도 하다. 오늘 들른 Shakesphere and Company는 a와 함께 본 비포 선셋에 나온 책방이었다. 지난 번에는 우연히 미드나잇 인 파리의 ost를 들으며 걷다 엔딩 속 그 다리를 건너는 신기한 일도 있었다.
무심코 휴대폰을 뒤집었는데, 그곳에 벚꽃이 없었다. 작년 봄에 무언가를 오래도록 생각하며 휴대폰 뒤에 꽃아 둔 꽃잎이었다. 금방 시들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케이스가 아주 지저분해질 때까지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하나처럼 붙어 버려서 앞으로도 거기 있을 줄 알았던 것이 결국은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시원했다. 나는 아직도 그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그렇다. 여전히 그것은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가끔은 좋고 가끔은 아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즘은 거의 떠오르지 낞는다. 꽃잎이 사라져서일까. 끝날 것 같지 않던 여행이 끝나 듯, 어떤 마음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내 마음에는 또 다른 것이 불쑥불쑥 노크를 한다.
이번 여행 내내 ‘공룡의 이동 경로’를 읽었다.출발하는 비행기에서 펼쳐서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덮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솔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떠나간 사람에게 ‘왜 나를 떠났니’하고 한 마디 묻지도 못하는 사람. 그리고 나도 솔아처럼 글을 쓴다. 후련해지거나 날려보낼 감정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쓴다. 내 글에도 솔아처럼 ‘마음, 우리, 기분, 생각, 나’ 같은 말들이 빼곡하다. 전혀 공감대가 없는 이야기인데도 내가 그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의 노트에도 잊지 않으려 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마음은 어느새 계절처럼 바뀌어가고, 글로 적은 순간의 본심은 박제되어 영원하다. 아쉬워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오랫동안 딛고 있던 익숙한 땅에서 마침내 두 발이 떨어진다. 하늘을 나는 (혹은 정지된) 비행기 속에서 ‘나는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걸까?’ 하는 시시콜콜한 질문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다 보면 또 밝게 빛나는 땅이 나오고, 마침내 다시 땅에 닿는 감각은 어색하고도 반가운.
02.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