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박하우스의 브람스, 그리고 렘브란트가 남긴 거친 물감의 위로
Brahms: Piano Concerto No. 2 in B-Flat Major, Op. 83: I. Allegro non troppo
https://www.youtube.com/watch?v=hwAU6_PfkGA
- Wilhelm Backhaus, Kar Bohm, Wiener Philharmoniker
- 1967.4, 빈 소피엔잘
Episode.1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의 파인 주름을 발견할 때면
우리는 흔히 젊음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상실감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예술이 젊고 매끄러운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만년의 자화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대한 풍경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젊은 시절 부와 명예를 누렸던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거만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을 매끄럽게 그렸지만,
파산과 아내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풍파를 모두 겪고 난 노년의 자화상에서는
모든 허영의 장식을 걷어냈습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얇게 펴 바르는 대신,
마치 흙을 이겨 바르듯 두껍고 거칠게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자신의 깊게 파인 주름과 뭉툭한 코를 투박하게 묘사했죠.
하지만 그 거친 물감의 덩어리들 위로 떨어지는
은은한 황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젊은 시절의 얄팍한 아름다움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인간애가 그곳에 스며있음을 알게 됩니다.
Episode.2
제 음반 장에도 렘브란트의 그 두텁고 주름진 자화상을 꼭 닮은
음반이 하나 있습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한 해가 저물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이 오면,
저는 어김없이 1967년 영국의 데카(Decca) 레이블에서 발매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음반을 CD 턴테이블에 올립니다.
건반의 사자라 불렸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가
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긴 전설적인 녹음입니다.
이 음반이 만들어질 당시 박하우스의 나이는 무려 여든셋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역사적인 녹음 현장에 얽힌 작은 일화입니다.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거장 칼 뵘의 나이가 일흔셋이었는데,
거대한 협주곡의 녹음을 무사히 마친 여든셋의 박하우스가 뵘을 향해
“저 젊은 친구가 브람스를 참 잘해”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일흔셋의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를
한낱 ‘젊은 친구’로 부를 수 있었던 여든셋의 피아니스트.
이 유쾌하고도 경이로운 에피소드는
이 음반이 품고 있는 시간의 지층이 얼마나 아득하고 깊은 것인지 짐작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