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 그리고 카라얀이 빚어낸 바흐의 대성당
J.S. Bach: Matthäus-Passion, BWV 244, Pt. 1: No. 1, Chorus. Kommt, ihr Töchter, helft mir klagen
https://www.youtube.com/watch?v=c3x-MlcY3y4
- Herbert von Karajan, Berliner Philharmoniker
- 1972.1, 베를린 예수 그리스도 교회
Episode.1
“아들아, 매일 같은 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물을 준다면 죽은 나무도 마침내 꽃을 피운단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이 당장 내일 멸망한다면,
혹은 내 삶을 지탱해 오던 모든 믿음과 평화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위대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영화 <희생>은
스웨덴의 황량하고 차가운 바닷가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래된 수도승의 전설을 들려줍니다.
산꼭대기에 심은 죽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
수도승이 3년 동안 매일 물동이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온 마음을 다했더니
마침내 그 마른 가지에서 기적처럼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서늘하고도 경건한 오프닝 시퀀스의 배경으로,
아주 무겁고 웅장한 합창곡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인류가 빚어낸 가장 거대한 종교 음악,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Episode.2
저는 가끔 타르코프스키가 심었던 그 앙상한 죽은 나무가 눈앞에 아른거릴 때면,
서재의 커튼을 깊게 치고 아주 거대하고 경건한 음반 하나를 꺼내 듭니다.
1972년,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싱아카데미 합창단을 이끌고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녹음한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이 곡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수미상관으로 장식하며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영적인 공기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음악입니다.
평화로운 생일날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한 주인공 알렉산더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이성을 버리고
가장 소중한 집을 불태우는 그 처절한 제의식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의 희생을 묘사한 바흐의 음악과 완벽하게 포개어지며
우리의 영혼을 묵직하게 짓누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