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와 켐페가 완성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부재의 미학
Episode.4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1악장은
정경화가 첫 음을 내기 전부터 이미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루돌프 켐페와 로열 필하모닉은
서둘러 음악을 밀어붙이지 않고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음악이 스스로 공간을 채워가도록 시간을 줍니다.
현악기의 잔잔한 움직임, 금관의 절제된 울림,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작은 떨림들이 모이며
정경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설 순간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그녀가 첫 선율을 긋는 순간,
그 정적은 단숨에 집중된 빛으로 변합니다.
무대 위 불이 천천히 켜지는 장면처럼 자연스럽고 강렬합니다.
Episode.5
2악장은 이 협주곡의 심장 같은 부분입니다.
정경화가 켜는 선율은 누군가에게 조용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이 장면을 위해 켐페는 오케스트라를 거의 뒤로 물립니다.
로열 필하모닉은 지나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악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받침대를 만들어 줍니다.
이 악장은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인물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각자의 생각을 중얼거리는 순간과도 닮아 있습니다.
감정이 대사로 설명되기보다
침묵 속에서 스며 나오는 장면 말입니다.
Episode.6
3악장은 절정이지만 크게 폭발하지 않습니다.
브루흐는 마지막 악장을 빠르게 끌어올리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늘 한 번씩 속도를 늦추며
감정의 정점을 부드럽게 흘려보냅니다.
정경화는 힘을 과하게 주지 않고
선율을 단단하게 밀어가면서도
어딘가 여백을 남겼습니다.
켐페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음량을 한꺼번에 올리는 대신
정경화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떠받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 악장은 화려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화면이 완전히 닫히는 대신
빛이 조금 남은 상태로 서서히 어두워지는 듯한 결말입니다.
베케트의 연극에서 고도가 끝내 등장하지 않듯,
브루흐의 음악 또한 결말을 확정하지 않은 채
여운을 관객에게 남겨줍니다.
2악장 - Adagio(느리게)
https://www.youtube.com/watch?v=EcSLs8J7U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