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존 덴버의 〈Annie’s Song〉
Episode.6
이 교향곡을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와 함께 연주한
1990년 도쿄 산토리홀 실황으로 들을 때, 이러한 성격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스베틀라노프의 해석은 전통적으로 선이 굵고, 세부보다 전체의 흐름을 중시합니다.
그는 감정을 다듬기보다 풀어놓고, 균형을 맞추기보다 밀어붙이는 지휘자입니다.
이날의 연주는 특히 그러합니다.
음악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클라이맥스는 한 번에 정점에 도달하기보다 여러 겹으로 중첩됩니다.
Episode.7
1990년이라는 시점은 이 연주에 지울 수 없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냉전이 사실상 막을 내리고, 소련 체제가 해체 국면으로 접어들던 해빙기의 말미.
확신의 이념은 무너졌지만,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감정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스베틀라노프의 차이코프스키는 바로 이 상태를 반영하듯,
극복의 서사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연주에서 교향곡 5번은 무너진 이후에도 계속 울리는 음악입니다.
Episode.8
공연이 이루어진 공간 또한 중요합니다.
도쿄의 산토리홀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보석 상자’라 부르며 극찬한 홀입니다.
산토리홀은 소리를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고, 음의 밀도와 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이 홀에서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어두운 음색과 스베틀라노프의 거친 호흡은 숨김없이 노출됩니다.
이 교향곡의 불안과 과잉,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은 오히려 이 공간에서 설득력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