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절벽 끝, 혼자 선 자의 뒷모습(3)

슈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편지, 그리고 알반 베르크 콰르텟의 전설

by 클래식덕후문쌤

Schubert String Quintet in C Major, Op. 163, D. 956: III. Scherzo. Presto - Trio. Andante sostenuto

https://www.youtube.com/watch?v=Uf605OW5ues



Episode.7


프리드리히는 이 그림에서 아주 독특한 구도를 취합니다.


그는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과감하게도 ‘뒷모습(Rückenfigur)’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짙은 녹색 정장 코트를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이 선 남자의 등.


프리드리히는 관람자가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을 읽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그 남자의 시선이 되어


안개 너머의 무한한 공간을 함께 응시하게 만듭니다.


그 뒷모습은 거절의 표시가 아닙니다.


“나와 함께 이 막막한 심연을 바라보지 않겠소?”라는 고독한 초청장입니다.


그림 속 남자가 바라보는 안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 혹은 신의 영역인 ‘숭고(Sublime)’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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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8


슈베르트의 2악장은 바로 이 그림을 소리로 번역해 놓은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첼로가 아주 느린 호흡으로 노래를 시작하면,


나머지 악기들이 피치카토로 ‘둥... 둥...’ 하며 반주를 넣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개 낀 절벽 위에 선 방랑자의 서서히 멈춰가는 심장 박동 같습니다.


알반 베르크 콰르텟은 여기서 숨이 멎을 듯한 약음을 구사하는데,


이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방랑자가 느꼈을 그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의 겸허함,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숭고한 침묵처럼 들립니다.



image.png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pisode.9


하지만 평온함도 잠시, 곡의 중간부에서 갑자기 F단조의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마치 방랑자의 발아래,


안갯속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바위들이 드러나고 거센 비바람이 치는 것 같습니다.


얌전한 코트를 입고 꼿꼿이 서 있던 방랑자의 내면에서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한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을 슈베르트는 고백합니다.


이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고 다시 처음의 평온함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평화가 이승의 것이 아님을요.


방랑자는 안갯속으로 한 발자국 더 걸어 들어갔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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