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시간 속에서 캐낸, 거칠고 투박한 진심(2)

로스트로포비치가 베즐레의 돌벽에 새긴 바흐,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의 거울

by 클래식덕후문쌤

Bach Cello Suite No. 3 in C Major, BWV 1009: I. Prélude

https://www.youtube.com/watch?v=YUj-6Z8jCis&list=PLfJndz0utgOOzP7_TjeNMACwPZfDcPANx&index=15



Episode.3


로스트로포비치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냉전 시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온몸으로 관통한 ‘행동하는 지성’이었습니다.


옛 소련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였지만, 독재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자신의 별장에 숨겨주었다가


정부의 눈밖에 났고, 결국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서방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무너진 장벽 앞에서


바흐를 연주했던 그 백발의 노인을 기억하시나요?


그가 바로 로스트로포비치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수많은 난곡을 녹음하고 무대를 호령했지만,


유독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앞에서는 침묵했습니다.


“내 음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프랑스의 베즐레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나이 예순이 훌쩍 넘어서였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바흐와 독대할 용기를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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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4


제가 소장한 로스트로포비치의 1995년 발매 EMI 음반은


그 베즐레 성당의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습니다.


요즘의 매끄러운 디지털 녹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활이 현을 긁는 거친 소리,


연주자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성당의 차가운 돌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웅장한 잔향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투박하고 묵직한 질감은 묘하게도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의 흑백 사진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녀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위에서 아래로 뷰파인더를 내려다보며 거리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그녀의 사진 속 피사체들이 예쁘게 포장되지 않은 채


자글자글한 필름 입자 속에 박제되어 있듯,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역시 날것 그대로의 거친 입자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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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5


그렇다면 이 거장이 평생을 망설이다


세상에 내놓은 바흐의 여섯 개 모음곡은 과연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요?


첼로라는 악기가 원래 베이스,


즉 저음을 담당하는 조연이었지만 바흐는


이 악기 하나로 멜로디와 화음을 동시에 연주하게 만들어 작은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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