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로포비치가 베즐레의 돌벽에 새긴 바흐,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의 거울
Bach Cello Suite No. 6 in D Major, BWV 1012: I. Prélude
https://www.youtube.com/watch?v=A7QjvJSF33A&list=PLfJndz0utgOOzP7_TjeNMACwPZfDcPANx&index=36
Episode.9
반환점을 돌아 만나는 제4번 E플랫 장조는 가장 난해하고 철학적인 곡입니다.
바흐는 첼로가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실험하듯 복잡한 화성과 조성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철학자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복잡한 미로 속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며,
인생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음표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습니다.
Episode.10
그리고 마침내, 이 여정의 하이라이트인 제5번 C단조에 도착합니다.
저는 이 곡이야말로 로스트로포비치 연주의 백미이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과 가장 닮아있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바흐는 이 곡에서 더 깊고 어두운 소리를 내기 위해
첼로의 가장 높은 줄(A현)을 일부러 한 음 낮게 조율하는 ‘스코르다투라’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소리는 더 먹먹하고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특히 5번의 ‘사라반드’는 멜로디라기보다 차라리 침묵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거울 자화상>을 떠올립니다.
쇼윈도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
로스트로포비치가 텅 빈 성당에서 홀로 이토록 느리고 낮은 소리를 켤 때,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가장 깊은 어둠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pisode.11
긴 어둠을 통과하고 나면 마지막 제6번 D장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곡은 고통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천국과도 같습니다.
원래는 줄이 다섯 개인 악기를 위해 작곡되었기에,
첼로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음역대를 넘나들며 화려한 기교를 뽐냅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여기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한 환희를 터뜨립니다.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라기보다, 모든 짐을 내려놓은 자의 가벼운 날갯짓 같습니다.
Episode.12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음반을 남기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필름 상자를 닫으며
"이것으로 내 삶은 충분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요.
두 사람 모두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인정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완성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예술은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마치 갓 구운 빵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발효된 술처럼 깊고 진한 향기를 냅니다.
Episode.13
오늘 밤, 너무 빠르고 가벼운 세상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를 들어보세요.
1번의 순수함에서 시작해
5번의 깊은 어둠을 지나
6번의 환희로 끝나는 그 긴 여정을 따라가 보세요.
그리고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을 찾아보세요.
먼지 쌓인 시간 속에서 캐낸 그들의 투박한 진심이,
당신의 지친 어깨를 말없이 감싸줄 것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