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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동안남 Mar 21. 2023

14편 : 코리안 특급 박찬호, 투머치 토커 박찬호

야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투수 박찬호, 애국자 박찬호를 간략하게 써보다.

IMF로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기, 그가 우리의 고달픔과 고난을 승리로 장식해 줘 희망을 준 투수. 1박 2일에서 아주 절묘하게 손가락으로 이용해 공을 탁구대 라인 끝에 걸쳐 나영석 피디를 어이상실하게 만든 선수. 지금은 말이 정말 많아서 정말 그만하라고 말리는데 다 들으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자산이자 엄청난 충고로 되는 멋진 인물.. 다들 이 정도면 짐작했을 것이다. 바로 박찬호 선수이다.


우리나라 야구가 경쟁력이 많이 실종된 지 오래되다 보니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박찬호 투수 같은 선수가 왜 나오지 않느냐는 반응이 많다. 그래서 왜 우리는 박찬호 투수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지에 대해 적어보겠다.


공주에서 태어나 공 하나는 정말 빠르게 던졌던 투수였다. 전국구 순위 5위 안에 드는 투수였다. 당시 그와 경쟁했던 에이스들은 고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등이 있다. 이 3명은 아마추어 때는 최고였지만 불운과 자기 관리 실패로 우리에게 씁쓸한 결과를 안겨준 인물이 되었다. 그 와중에 박찬호는 엄청난 노력과 훈련, 그리고 자신만의 롤모델인 놀란 라이언의 투구 폼을 연구해 이를 승화시켜 엄청난 활약을 시작한다. 


그 노력이 통했을까?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어 우선적으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오퍼가 들어왔지만 병역 문제로 무산되었다가 다시 LA다저스의 오퍼로 우리나라 최초 메이저리그 선수 계약에 성공한다. 그 후, 그는 1994년 마이너리그로 가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당시 17번째의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시기상조였고, 정말 고난과 역경 그리고 눈물 나는 마이너리그 시절을 겪게 된다.


이 마이너리그 시절은 박찬호 선수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모든 것이 혼자였던 그.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내며 포기하지 않는 근성에 악바리까지 추가되었으니 정말 가히 밑바닥에서 정점까지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그 후, 1996년 그는 최초로 구원승을 거둔다. 상대팀은 시카고 컵스였고, 당시 4번 타자이자 전설적 선수인 마크 그레이스가 전설적인 말을 남긴다. '저 녀석과 앞으로 10년 이상을 상대해야 하니, 정말 머리가 진저리 나겠군........'


그의 진저리가 통했을까? 박찬호는 그때부터 펄펄 난다. 1997년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해 10승 이상씩 2001년까지 맹활약을 펼친다. 물론,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만루홈런 2개를 맞는 정말 믿기지 않는 기록도 남겼고, 중간에 싸움도 나서 징계도 받는 등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선발투수로서 그는 약물 시대에 찌든 타자들을 압도했다.


그 후, 그는 FA를 통해 2002년 텍사스로 이적하는데, 거기서부터 그의 고난과 역경과 정말 눈물 나는 메이저리그 생활이 열린다. 부상을 참고 뛰었던 것이 독이 되고, 결국 텍사스에서 몰락하여 먹튀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선발 투수보다는 중간이나 마무리 아닌 마무리로 뉴욕 메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을 돌아다니며 마이너리그와 다시 메이저리그를 왔다 갔다 하는 눈물 나는 선수 생활을 한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공을 뿌리며 결국 노모 히데오가 기록한 아시아 통산 승리투수 기록을 깨고 124승을 만들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는 일본 오릭스로 갔지만 부진과 불운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12년 연고팀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은퇴한다. 여기까지가 그의 일반적인 기록이다.


박찬호 투수는 앞에서 말한 기록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 모범적인 경우가 많았다. 바로 애국심. 


그는 한국 야구가 언제든지 불러주면 달려갔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WBC 대회 등등 기회만 되면 플레이를 펼쳤다. 그로 인해 다시 미국에 가서 애를 먹었긴 했지만, 팬들은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그의 업적을 생각해 오히려 많이 격려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애국적 활약은 현재까지도 많은 야구인들 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어찌 보면, 그가 외환위기 시절에 성원해 준 팬들이 있었기에 그도 국민의 성원을 업고 활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야구 철학은 오로지 대한민국 투수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박찬호 투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광고 출연, 예능 출연으로 수많은 부가 수익도 창출했고, 성금도 당시 1억이라는 정말 어마어마한 쾌척도 봤었다. 어찌 보면 그는 진정한 애국자일 수도 있다. 향후, 그가 나오는 메이저리그 연금은 1년에 3억이니... 그는 그 돈을 받을 충분한 자질과 자격이 있다.


박찬호 투수하면 우리가 항상 말하는 게 투머치 토커... 말 그대로 말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박찬호 선수와 소통하면 최소 몇십 분을 서 있어야 한다. 한 때 그가 강의를 했는데 2시간짜리 강의가 무려 3시간 ~ 4시간까지 갔다고 하니, 얼마나 그의 입담이 강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수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잔소리가 아닌 상대방에게 멋진 미래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보물 같은 말들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박찬호의 긴 조언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그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만큼 국제대회에서 해설을 맡게 되면, 쓴소리와 잔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야구를 위해 야구를 사랑하는 그가 하나하나 말하는 멘트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 공감한다. 오히려 선수들이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고, 그것이 성적으로 나타나는 초라한 결말을 맞기도 했다.


박찬호 투수에 대한 짧게 적어보았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적기에는 사실 너무도 방대하다. 아마추어, 미국 생활, 일본 생활, 한국 생활, 국제무대, 훈련 방식, 그가 남긴 여러 조언들을 모두 적는다면 최소 책 1권이 나올 분량이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방대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필자가 적기에는 여유가 부족해서 아쉽기도 하다.

이제는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해 달리고 있는 그. 현재 우리나라 야구는 침몰하고 있다. 위기의 한국 야구를 그가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고, 또 어떤 스타일로 야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일지 기대된다. 야구팬들은 그의 플레이에 매료되었고, 이제는 그가 중년 야구인으로서 우리나라 야구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도록 기원하고 있다.


빠른 볼과 특유의 변화구로 삼진을 잡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이제 우리도 그의 야구 정신을 거울삼아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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