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만, 오늘도 죽지 않았을 뿐
사는 건 ‘고통’이라는 한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의 층위를 건너는 일 같다. 삶은 원래 이런 법인데, 그렇게 믿기에는 직면한 현실과의 괴리감에 당위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세상이 선할 줄만 알았다. 병든 사회가 나를 아프게 한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죽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죽고 싶은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나는 그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떠올릴 뿐이다. 죽음을 원한다기보다는, 죽음과 닮은 어떤 무감각한 상태.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죽음밖에 없을 뿐이다. 하지만 죽음조차 고통을 수반하니, 죽을 수는 없다.
자살은 나에게 너무 많은 ‘의지’를 요구한다.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그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고통을 겪는 과정 없이도, 삶과 죽음을 뚝 이어 붙여도 자연스러웠으면 한다. 그러나 그런 자연스러움조차 내 삶에는 없다. 난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 불면을 겪나 보다.
며칠 전, 가족과 다툰 이야기를 의사에게 했다. 그는 그것을 ‘삶의 의지’로 해석했다. 다투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며,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고.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칭찬받는다는 게. ‘평범히’라는 게 이미 뭔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런데 상담 시간이 길어지면 병원비가 오른다. 왜 나아졌는데 비용은 더 드는 걸까. 살고 싶지 않아도, 말할수록 생존의 비용이 늘어난다.
‘도움’이라는 건 그렇다. 나아졌다고 말하면 덜 도와주고, 안 나아졌다고 말하면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 나는 정신적으로 몇 번이나 죽었다. 도움을 청해도,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약자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외면할 때도 나는 같은 고통을 다시 겪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너무 조용해서, 곁에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말해도 닿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닿을 수 없는 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가끔은 자살 유가족을 탓하는 글을 마주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글을 보며 나는 스스로 물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나조차도 나를 구원할 방법을 모르니까. 애초에, 타인이 구원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한 활동들이 귀찮다. 배고픈 것도, 피곤한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통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잃어갔다. 처음 의사를 만났을 때, “먹지 않아도 행복하게 해 줄게요.” 그 말이 좋았다. 생존을 위한 활동 중 유일하게 의식하지 않고도 행복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건 마치 고통과 상관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약속처럼 들렸다.
사람의 행동을 두고는 늘 해석이 생긴다. 살 의지가 없어도, 살아 있음을 유지하려는 행동을 하면 살고 싶어 한다고 판단되는 것 같다. 그건 의지라기보다는, 단지 ‘증거’였다. 살고자 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 얼마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이비를 만났다. “졸업도 하셨고, 능력도 있으신 분 같은데 아무런 계획이 없으신 걸 보면 사정이 있으신 것 같네요.” 흔한 수법일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말 앞에서 멈칫했다. 그러게요. 나, 왜 이러고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요즘 나의 유일한 목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노력마저도 하지 않아야 진정한 부유(浮遊) 일 텐데.
그래서 난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소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자살이라 불러야 할까. 굳이 이름 붙이고 규명하면 무언가 본질에서 벗어나 버릴 것 같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들어가기를 의욕하지 않는다. 수명이 다한 형광등은 갈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버리는 행위, 가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인지하지도 못한 어느 순간 새로운 것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어릴 적부터 잘 죽기 위해 노력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채로 살아 있는 상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능동적인 행위가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니까. ‘능동’이라는 말조차 이 상태에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기만 해서.
죽음이 무언가를 달성하는 행위라고 느껴 본 적은 없다. 내 죽음엔 의미도, 완성도 없고, 그저 낙엽이 썩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안에 어떤 의지도 개입될 수 없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되는 일이니까. 기억할 수 없는 결함의 기원 같은 건 모르겠다. 그저,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냉소적인 인식만을 품고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 게 삶이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조금은 살고 싶어졌다. 이건 의지도, 희망도 아닌 상태. 그저 ‘현상 유지’에 가까운 감각. ‘살고 싶다’는 말도 조심스럽다. 그 말은, 어딘가 기대나 목표를 품고 있는 것 같으니까.
4월의 목표는 여전히 ‘죽지 않기’다. ‘여전히’라는 말을 쓰면, 마치 항상 그랬던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하고 나면, 그 말의 무게를 곱씹게 된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해 본다.
세상에 날 감당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지 않으려 애쓴다. 사실, 사람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들이 뭘 해 주길 기대한 적도,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 적도 없다. 관심이 없으니, 건넬 말도 없다. 가끔 외로울 때면, 그저 영혼을 가꾸는 식으로 자신을 달래는 데 그친다. 그냥, 나는 그런 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