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스탕달, 그리고 나폴리
"나폴리를 보고 죽어도 좋다”
괴테, <이탈리아 기행> 중에서
1. 나폴리라는 도시
2.괴테가 본 나폴리
3.스탕달이 본 나폴리
4.같은 도시, 다른 기록
5.내가 만난 나폴리
나폴리에 대한 동경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 쏠레미오’란 이탈리아 민요를 배우면서 나폴리를 듣게 되었다. 이후 ‘나폴리’라는 이름은 언제나 낭만적이었고, 동시에 신비로웠다. 책 속에서 반복되던 그 지명은 실제의 장소라기보다, 마음속에 먼저 자리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부터 찾았다. 바다를 끼고 들어선 도시, 항구의 곡선, 삶과 풍경이 맞닿아 있는 감각을 그곳에서 먼저 익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다. 진짜 나폴리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이탈리아 여행 중에 나폴리에 가게 되었을 때의 설렘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그 도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이제야 처음 만나는 장소처럼 낯설었다.
여객선이 나폴리항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언덕위의 바다와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누오보궁전이 보였다. 누오보 궁전 뒤로는 베수비오 산이 보였다. 베수비오 화산과 나폴리만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그 아래는 오래된 건물과 배들이 모여 있었다. 아름다운 미항으로 손꼽히는 나폴리의 명성과 내 오랜 상상과 실제가 겹치는 순간이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아뿔사!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패키지여행의 폐해답게 그 도시를 관통하여 스쳐지나야 했다. 누오보 궁전의 겉모습만 바라보면서 도시의 중심 장면에서 멀어질수록 거리는 시간이 남긴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책과 노래가 만들어 놓은 나폴리는 햇빛과 활력의 이미지로 가득했지만, 내가 마주한 나폴리는 그보다 훨씬 무거운 현실을 안고 있었다. 난민과 떠도는 사람들,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도시의 외곽은, 오랫동안 품어 온 환상이 어디까지가 상상이었는지를 차분히 되묻게 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사랑해 온 나폴리는 실제의 도시라기보다, 시간과 책과 지명이 함께 만들어 낸 마음속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여행객 중 누군가는 기대와 실상이 달랐는지
왜 나폴리가 미항으로 손꼽히게 되었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가이드 왈, 나폴리를 집으로 둔 뱃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하지 않았겠나, 거친 바다와 싸우다가 집으료 돌아올 때
멀리 배수비오산이 보일때 세상 어디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보였지 않았겠나, 그것이 회자되어 미항으로 자리잡지 않았겠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의 중심 도시이자, 지중해와 베수비오 화산 사이에 놓인 오래된 항구 도시다. 그리스 식민 도시 ‘네아폴리스’에서 시작된 이 도시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문명과 권력이 겹쳐 지나갔고, 그 흔적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삶과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베수비오 화산은 여전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폐허는 문명의 취약함을 고요히 증언한다. 동시에 나폴리는 활기차고 소란스럽다. 좁은 골목과 빽빽한 주거 공간, 거리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 도시를 처음 찾는 여행자에게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혼란 속에 나폴리의 생명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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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1787년, 이탈리아 기행 여정 속에서 나폴리를 만났다. 그는 “나폴리를 보고 죽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감정의 과장이 아니라, 세계를 온전히 이해했다는 감각에 가깝다. 괴테의 나폴리는 질서 바깥의 도시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 안에 있는 도시였다.그는 이탈리아 기행의 경험을 고국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다. 그의 기록에서 나폴리는 관찰과 사유의 대상이다. 괴테는 이 도시를 서두르지 않고 바라본다. 자연의 질서, 건축과 예술, 인간의 삶이 이루는 균형을 차분히 기록하며, 나폴리를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이해하려 한다.
그에게 나폴리는 무질서한 도시가 아니라, 삶이 예술보다 먼저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규칙보다 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자연은 언제나 일상의 배경으로 함께한다. 베수비오와 바다,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서 괴테는 삶의 현재성을 발견한다. 괴테가 베수비오 산을 직접 등정하고 그가 용암이 끓고 있는 베수비오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은 경탄스럽다. 나폴리로 입성하기 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세밀하고 아름답다. 담록색의 올리브, 광귤나무, 황록색의 석류, 수선화와 복수초, 융단같은 밀밭길, 좁은 계곡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 그의 나폴리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배우는 장소다.
스탕달은 괴테와는 다른 면으로 나폴리를 본다. 스탕달의 나폴리는 전혀 다른 얼굴을 지닌다. 그의 여행기는 편지보다 일기에 가깝고, 설명보다 반응에 가까운 기록이다. 스탕달은 자연이나 도시 구조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인다. 거리에서 만난 인물들, 그들의 말투와 태도, 욕망과 허영이 그의 문장을 채운다.
나폴리는 그에게 안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강렬한 햇빛과 소음, 인간의 밀도가 만들어내는 과잉된 감각은 스탕달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흔들어 놓는다. 훗날 ‘스탕달의 증후군’이라는 말로 불리게 될 만큼, 그는 아름다움 앞에서 자신을 절제하지 않는다. 스탕달에게 나폴리는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며 통과해야 할 도시다.
같은 도시를 방문하고 남긴 기록은 이처럼 크게 다르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두 사람의 출신 나라가 달랐기 때문일까, 여행 당시의 나이가 달랐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러한 조건들은 낯선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괴테의 기행문은 고요하고 품위 있다. 그는 자연과 예술을 통해 삶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정제한다.
반면 스탕달의 기록에는 과잉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고, 흔들리며,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괴테가 사유의 기록을 남겼다면, 스탕달은 감정의 기록을 남겼다. 이 두 개의 시선 덕분에 나폴리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텍스트로 존재하게 된다.
1) 폼페이 유적
나폴리항을 스쳐지나온 이유가 있었다. 나폴리를 빠르게 통과한 이유는 나폴리와 가까운 인근에 있는 폼페이와 쏘렌토로, 카프리 섬으로 가기 위해서란다. 폼페이라니! 우리가 전설처럼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폼페이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에 위치한 고대 로마 도시로,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묻혀 소멸했다. 그 덕분에 거리, 주택, 벽화와 일상의 흔적들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고대 로마인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오늘날 폼페이는 삶과 죽음, 문명의 덧없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유적지로 남아 있다. 폼페이는 18세기 중반, 정확히는 1748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발굴은 당시 나폴리를 지배하던 부르봉 왕가의 후원 아래 진행되었고, 이후 헤르쿨라네움과 함께 유럽 전역에 고고학·고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폼베이의 베수비오 산: 베수비오산은 분화가능성이 있는 활화산이라고 함.)
괴테는 베수비오산을 직접 등정했고, 괴테가 올랐을 당시에도 용암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고 <이탈리아 기행>에서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베수비오산을 등정하지는 못하고 베수비오산에서 폭발한 화산재로 인해 사라지게 된 폼페이 유적지만을 가게 되었다. 베수비오산과 폼페이까지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꽤 먼 곳이었다. 그런데 산에서 흘러나온 화산재에 뒤덮혀 도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폼페이 가는 길의 시골 농가에는 집집마다 레몬트리가 심겨져 있었다. )
( 폼페이 유적지로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하얀 민들레. 로마는 같은 시기 (2월 초)의 겨울이라도 폼페이는 따뜻했다.)
(폼페이 유적지 오르는 길에서 만난 야생 아욱꽃, 지중해 연안과 남부 이탈리아에서 흔히 자람.)
발굴된 폼페이의 유적지
(멀리 베수비오산이 보이고, 폼페이의 유적지 안의 광장)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원형극장)
2)카프리섬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알려진 카프리섬이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우기 중이었다. 카프리 섬의 앞바다는 지중해의 푸른빛이 가장 극적으로 응축된 공간이다. 섬을 둘러싼 바다는 수심이 깊어 색이 한층 짙고, 햇빛의 각도에 따라 남청색에서 에메랄드빛으로 빠르게 변하며, 절벽 아래에서는 바위와 반사된 빛 때문에 유리처럼 투명해진다. 특히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질 때면, 카프리의 바다는 휴양의 배경이 아니라 고대부터 사람들이 동경해 온 ‘이상적인 바다’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카프리섬의 진입 항구(마리나 그란데 쪽)
카프리 섬의 아나카프리(Anacapri) 쪽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지중해의 한 부분인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이고, 지형적으로는 나폴리 만(Golfo di Napoli)에 속한 바다이다.
이곳은 카프리섬의 비아 크루프(Via Krupp)로, 절벽을 따라 굽이치며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과거 마차가 다니던 도로로 조성되었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섬에 머물며 사용하던 동선과 연결된 길로 알려져 있다. 절벽을 직선으로 뚫지 않고 자연의 경사를 따라 우회하며 이어지는 이 길은, 황제의 별장들, 특히 빌라 요비스로 향하던 카프리의 공간 질서를 보여 준다. 인간의 권력과 욕망이 개입된 길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정복하기보다 그 곁을 따라 움직이도록 허락된 길이라는 점에서, 카프리섬과 나폴리 주변 풍경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3)쏘렌토로
여기는 노래로 더 유명한 곳이다. 노래〈쏘렌토로 돌아오라(Torna a Surriento)〉는 1902년 나폴리 인근 도시 쏘렌토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칸초네로, 떠나가는 이에게 고향의 바다와 향기, 빛을 기억하게 하며 돌아오기를 호소하는 노래이다. 이 곡에서 쏘렌토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사랑과 젊음, 잃어버린 시간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맑은 바다와 레몬 향, 저녁노을 같은 감각적 이미지로 불려진다. 그래서 이 노래는 여행지의 찬가라기보다, 떠나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리움의 지리학을 노래한 곡으로, 나폴리와 쏘렌토 일대의 정서를 가장 깊게 전해주는 음악으로 남아 있다.
쏘렌토로의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이다. 우리나라 감나무같은 오렌지가 심겨져 있다.
쏘렌토 앞바다는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로, 지중해의 한 부분에 속한다.
쏘렌토는 나폴리 만의 남쪽 끝에 자리해 있고, 맞은편으로 카프리 섬, 북쪽으로 나폴리, 멀리로는 아말피 해안과 이어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그래서 쏘렌토에서 보는 바다는 탁 트인 대양의 느낌이라기보다, 지중해 특유의 온화함과 만(灣)의 깊이를 함께 지닌 바다로 느껴진다.
이 절벽 위에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가 머물렀던 것으로 유명한 엑셀시어 비토리아 호텔(Grand Hotel Excelsior Vittoria)가 자리한 지역이다.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테너였던 카루소는 소렌토에 머무르며 이 호텔을 애용했고, 그가 이곳에서 노래와 휴식을 즐겼다는 일화는 지금도 이 호텔의 역사로 전해진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과 고요한 풍경은 무대 위의 성악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카루소가 숨을 고르던 장소였고, 이 사진 속 소렌토의 풍경은 예술가들이 왜 이곳에 머물고 싶어 했는지를 조용히 설명해 준다.
나폴리 여행은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이었다. 이용한 이동 수단도 기차, 버스, 여객선 등 다양했고, 날씨도, 기온도 변화무쌍했다. 괴테에 가까운 감정으로 나폴리를 보았다. 도시의 중심을 깊이 관통하기보다는, 그 주변을 돌며 나폴리를 이해했다. 베수비오산과 폼페이, 카프리 섬, 소렌토로를 방문하며, 나는 나폴리를 언제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로 깊이 들어가기보다, 자연과 유적, 바다와 폐허를 통해 이 도시를 읽었다. 분화 가능성이 있는 활화산인 베수비오의 위압적인 존재는 나폴리가 품고 있는 불안을 말해 주었고, 폼페이의 정지된 시간은 삶의 덧없음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카프리, 쏘렌토로에서 마주한 풍경은 나폴리를 둘러싼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나폴리는 도시의 중심을 통과해 이해한 공간이 아니라, 주변을 따라 이동하며 사유하게 만든 도시였다. 그 방식은 괴테가 자연과 예술을 통해 이탈리아를 받아들였던 태도와 닮아 있다. 나폴리는 그렇게, 설명되기보다 천천히 생각하게 만드는 도시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