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워싱턴, 차 안에 앉아 있는 안전기획부 1팀 차장 박평호(이정재)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한다. 대통령의 순방 일정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교민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워싱턴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그곳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전신 브로마이드에 "살인자"라고 써놓고는 불로 태우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허가받은 시위라 그 무섭다는 안기부도 어쩔 수 없었다. 안기부 1팀 요원이자 평호를 따르는 방주경(전혜진)은 평호와 함께 분주히 경호를 준비하고 대통령 안기부 2팀 차장 김정도(정우성)와 장철성(허성태) 또한 분주히 경호를 준비한다. 그때 대통령을 암살하는 계획이 있다는 첩보가 들려오고, 그들은 첩보가 무슨 내용인지 알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때 평호와 정도가 마주치게 되는데, 정도는 평호에게 빨리 가지 않고 뭐하시는 거냐며 대놓고 꼽을 준다. 이때부터 관객들은 둘의 사이가 껄끄럽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암살범들과 안기부 요원들은 총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암살범이 평호를 인질로 잡게 된다. 그걸 본 정도는 경호원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는 손을 들라고 소리친다. 그 과정에서 평호는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고, 정도는 암살범을 쏴서 제거한다. 정도와 평호는 악에 받친 눈빛 교환을 하고, 걸어가는 정도를 평호가 붙잡으며 소리친다. 우리가 예고편에서 수없이 들었던 대사를. "인질을 사살하면 어떡해?" 인질이 되지 말았어야죠!"
그 후 워싱턴 사건 때문에 고위급 간부로 보이는 송영창에게 까이던 평호와 정도는 겨우겨우 문 밖으로 나온다. 그때 정도는 뜻밖에도 평호에게 호의적이고 깍듯하게 대한다. 많이 배우겠다고 꾸벅 인사를 하지 않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않나. 평호는 뭔가 불편한 듯 보이지만 어쨌든 수락한다. 그렇게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정도의 아내는 말씀 많이 들었다면서 과거에 이미 두 사람이 만났었고, 정도는 평호를 다시 만나게 되자 멋쩍었다고 말했다는 것까지 말하게 된다. 그 말을 들은 정도는 아내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하지만, 평호는 호탕하게 웃더니 과거의 일을 스스럼없이 꺼낸다. 알고 보니 정도는 10.26 사태 관련 인물을 잡아들였을 때 평호를 고문했던 사람이었다. 평호는 그때 이 친구랑 열흘 정도 같이 있었는데, 아직도 손가락 마디가 나갔다고 자랑스럽게(또는 비꼬듯) 말한다. 정도는 평호에게 "차장님, 그때 일은 제가...."라고 하며 곤란함을 표출하고, 그런 정도를 평호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이 두 장면은 평호와 정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완벽히 보여준다. 정도는 10.26 이후 평호를 고문했고, 평호는 그런 정도를 아니꼽게 보고 있다. 그러면서 정도 또한 평호를 좋아하지 않게 됐지만 평호에게 죄책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둘의 사이를 좀 풀기 위해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호의를 베풀었던 거죠. 결국 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된다.
<헌트> 즉 사냥은 박평호와 김정도가 서로에게 하는 행위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결국 자신의 신념에 사냥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송영창 배우가 연기한 안기부 부장이 떠나고 난 후 새로 온 안기부 차장(김종수)이 서로의 빤스를 벗기라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를 사냥하게 된 둘은 각각 오랜 친구를 잃고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진 폭탄에 의해 목숨을 잃는가 하면,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가졌던 사람과 자신이 딸처럼 생각한 아이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과정이 어떻건 결과는 이토록 참담하고, 이는 격동의 현대사의 영향일 것이다. 박평호는 남파 간첩으로 내려온 이유가 대통령을 암살해서 협상을 통해 통일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평화를 위해서. 김정도가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던 것은 독재와 무자비한 탄압을 멈추기 위해서, 다시 말해 그의 목표 또한 평화였다. 하지만 그 둘은 마지막에 세계를 뒤흔들지도 모를 딜레마에 사로잡힌다. 북한에서 대통령을 죽인 후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따라서 그들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애초부터 서 있는 길이 달랐으니까. 그들은 결론적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들은 사냥당함으로써 영화는 끝난다.
이정재 감독은 신인 감독답지 않은 당돌한 패기와 과감한 각색으로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매직미러를 보며 싸우는 장면이나 총기 액션 장면, 사소한 대화 장면들마저 꽉꽉 공들인 것이 보이고, 빠른 템포로 관객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동시에 안정적인 연출력으로 집중을 잃지 않게 한다. 또한 비극적인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물 흐르듯 전달시키며 관객들에게 묵직하고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가 연기한 박평호라는 캐릭터는 일생에 긴장감만 가득 차있는 인물일 텐데, 그 긴장감을 표현하는 것은 이정재 배우가 적격이었다. 언제나 선보였던 훌륭한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작이자 최고의 연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우성 배우는 <아수라>, <증인>등 훌륭한 연기를 했던 배우이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불호 평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 <헌트>에서 선보인 연기는 정우성 배우를 혐오하여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싫어할 사람들 말고는 다 호평을 할 연기였다. 신념에 가득 찬 김정도라는 인물을 정말 괴물 같은 연기력으로 소화해낸다.
조연 배우들도 훌륭하다. 허성태 배우는 80년대에 분명히 존재했을 듯한 안기부 요원을 묵직하고 살벌하게 표현해냈고, 전혜진 배우는 그동안 경찰 역으로 차갑지만 정이 많은 그런 인물로 나왔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역할이지만 훨씬 가볍고 매력 있는, 하지만 진중한 캐릭터를 만난 것 같아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고윤정 배우는 <스위트홈>에서 처음 봤었는데 그때도 연기가 좋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극을 이끌고 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안기부에서 고문당할 때 "유정"의 그 매서운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유재명 배우와 김종수 배우는 검증된 명품 배우들답게 영화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들이 화면에 비치면 마음이 편해질 정도.
황정민, 박성웅, 김남길, 이성민, 주지훈, 조우진 등 이름을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주연급 배우들이 특별출연을 많이 했는데, 확실히 그 배우들이 나올 때 워낙 연기들을 잘하는 배우들이라 존재감들이 엄청났다. 하지만 황정민 배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단역들처럼 처리를 해서 나왔을 때 말고는 잊어버리게 된다. 초특급 카메오를 대하는 감독으로서 옳은 판단이었다고 본다.
음악감독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조영욱 음악감독의 음악도 꽤나 인상적으로 들었는데, 처음엔 음악감독이 누군지 모르고 봤다가 음악에서 묘하게 <헤어질 결심>의 느낌이 났다. 특히 엔딩의 음악. 그래서 "혹시....?"하고 엔딩 크레딧을 확인해 보니 진짜 조영욱이어서 놀라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조영욱 감독의 음악은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음악과 처연함을 이끌어내는 음악의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순식간에 밀도가 바뀌는 마법이 있다. 이병우 음악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음악감독 탑이라고 생각한다.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것보다 이정재, 정우성이라는 뛰어난 배우들의 합을 기대했는데, 두 배우의 합은 물론 감독 이정재의 뛰어난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정재, 정우성 두 배우를 눈앞에서 봤다는 것보다 이정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더 믿기지가 않을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어느 순간 왔다 갔다 하는 대사들이 마음속에 들어와 아려온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는 1980년대의 한국이라는 설정에서 뽑아낼 수 있는 건 다 뽑아낸 듯한 그런 영화이다. 한산, 외계인, 비상선언과 헌트를 포함한 올여름 빅 4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작품이다. 걸작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