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고 쓰고, 생각하자!

저자: 빅터 프랭클

옮김:이시형

부제목: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P10) 평소에 나는 유럽 학생들과 미국 학생들에게 거듭해서 이렇게 타이르곤 한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얘기하건대 언젠가는!-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19)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P90) 한 번은 한 무리의 죄수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과 비교해서 우리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커 보였는지! 우리는 그 죄수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잘 규정된,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정기적으로 목욕을 할 거야 하고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분명 칫솔과 옷솔을 갖고 있을 거야. 매트리스도 각자 하나씩 있겠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를 받을 거야.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 적어도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는 그런 편지 말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P99) 옆에 있는 시체, 이가 득실거리는 그 시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감시병이 지나가는 발소리만이 나를 꿈에서 깨울 수 있었다. 병실에서 부르는 호출이나 새로 들어온 의약품-약이라고 해봤자 아스피린 다섯 알 내지 열 알이 전부로 50명의 환자가 있는 막사에서 며칠이면 바닥이 나는 양이었다-을 받아가라는 소리 때문에 꿈에서 깰 때도 있었다.


(P120)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P126)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P131)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P139)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41) 수용소에서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금하는 엄한 규칙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두 개의 자살미수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두 사건의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그 동기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는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중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아이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일이었다. 이 사람은 과학자로 그동안 책을 써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P152)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P176)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214)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 비록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있는 법이다.


(P215)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221)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P228)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 의미와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은 허공에 떠 있다거나 상아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P235) 산 틴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를 털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P238) 나이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 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를 몰아친 적이 있다.

나이가 들거나, 나의 아는 바가 의미 없어지거나,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폐가 되거나...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연사'하는 것도 무척 행운이겠다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본다.

'쓸모 있다'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 가족, 주변사람들, 내가 속한 세상..

'쓸모 있다'의 기준은 뭘까? 돈을 버는 것, 자식을 잘 키우는 것, 가족을 잘 부양하는 것,

본인의 분야에서 뭔가를 해내는 것, 의미 있는 업적을 만드는 것...


들풀도, 한 줄기 바람도,

누군가에겐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다행과 감사함이 될 수 있다.

나의 쓸모를 함부로 정하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나'라는 상품을 비싸게 파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