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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당 Oct 06. 2021

나를 키운 방 혹은 집

  자그마한 방에 동생과 둘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나는 아마 예닐곱 살, 동생은 서너 살쯤 되었을까. 머리맡에 둔 장난감 그릇에는 가루가 된 새우깡을 소복하게 담아두었다. 곧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질 줄을 모르는지 알고도 꼭 해보고 싶었는지, 강판에 새우깡을 하나씩 갈아 가루로 만들어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피식대는 웃음 사이로 새우깡 가루가 어디로 날리는지도 모르고, 저녁 먹었으니 이제 자야지 하고 누워 있던 참이었다. 


  그 방. 붉은 반닫이 위에 이불이 쌓여 있고 그 옆에 서랍장이 하나, 반대쪽 구석에 작은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던 그 방.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던 방에 대한 첫 기억이다. 주인집을 포함해 다섯 개의 셋방이 마당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던 나의 첫 집, 또는 첫 방. 방에는 마주 보는 벽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부엌으로 나가는 문 하나는 엄마의 편물기가 놓인 가게로 나가는 문이었다. 가게문을 열면 폭이 2미터도 되지 않는, 시장통 입구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그 집은 부엌문과 방문과 가게문이 차례로 다 열려 있으면 마당에서도 골목이 보이는, 집 자체가 하나의 터널 같은 형태였다. 그렇게 열어두면 골목을 지나는 누구든 우리 집의 세간살이를 다 볼 수 있었는데,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렇게 방이고 부엌이고 문을 열어 두어 이웃집 살림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고 한다. 도둑이 두려울 리 없는 살림살이였다. 


  그 셋방 공동체에서 방을 두 번 더 옮겼다. 어느 셋방이든 방 하나와 바깥으로 딸린 부엌, 공용화장실이 전부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어떻게든 책상을 놓아야 했기에 손바닥만큼 더 넓은 대문 쪽 방으로 옮겼다. 세간살이는 얻어 온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전래동화 스무 권이 더 늘었다. 


  그다음 옮긴 세 번째 방에서의 기억. 나는 엎어져서 눈물 콧물 짜내며 울고 있다. 옆에 계신 외할머니가 놀리신다. “니 동생은 남자니까 엄마가 할매집에 데리고 갔지. 가시나가 뭐 중요하겠노.” 아마도 제사라 엄마가 동생만 데리고 멀리 할머니 댁에 간 날이었을 거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돌아오기만 해 봐라. 제대로 말대꾸도 못하는 멍청한 녀석. 더 세게 꼬집어 줄 거다.’ 애먼 동생을 향해 복수의 이를 갈며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마시던 어느 날의 기억. 

  

  2학년이 되어 좁은 통로 하나만큼 띄운 옆집으로 이사를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친구였던 내 친구네가 주인집이었다. 가게에 딸린 방 하나, 한 평 정도의 다락이 하나, 드디어 건물 안으로 확실하게 들어온 부엌이 있는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여전히 옆집과의 공용공간이었지만, 지분의 반을 갖게 된 셈이었다. 마음 좋고 순한 내 친구는 주인집 딸내미 유세를 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 코딱지만 한 방에서 잘도 놀았다. 7년을 살았던 곳이라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진을 보듯 세세하게 그려진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는 엄마의 편물기계가 오른쪽에는 패브릭 소파가 하나, 엄마가 짜 놓은 옷들과 여러 실들이 정리된 선반장이 하나. 정면 벽에 난 작은 미닫이문을 열면 방이었다. 작은 수납장과 얻어 온 책상, 자그마한 tv대와 tv, 냉장고 하나가 사면을 채운 방이었다. 83년에 산 금성냉장고는 아직도 엄마의 부엌에서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 방문 반대쪽에 있는 작은 문을 고개를 숙이고 나가면 부엌이 반 층 아래에 있었다. 나름 스킵플로어 구조였던 셈이다. 연탄아궁이로 난방을 하던 집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엌 한쪽 귀퉁이에는 시멘트로 가장자리를 메꾼 수조가 하나 있었는데 사시사철 식수와 목욕물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점점 커가고, 외항 선원이었던 아빠가 휴가를 받아 집에 오면 넷이서 누워 자기에는 너무도 작던 방, 나는 가게에 있는 소파에서 자거나 골목 맞은편 이웃할머니 집에 가서 잤다. 형편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없는 형편이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엄마는 골목 끝쪽에 있는 이층 양옥집의 이층을 빌렸다. 오로지 나의 공부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말이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는 어두워지기 전에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 들고 나의 방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생긴 내 방이었다. 책상과 서랍장 하나, 이불 한 채, 금붕어 한 마리, 화분 하나, 카세트 플레이어 하나로 빼곡하게 채운 그 방에서 중학교 2년 끝 무렵까지 호사를 누리며 지냈다. 


  중 2 말에 드디어 그 골목을 벗어났다. 그것은 탈출이었을까 아쉬운 이별이었을까. 너른 평지에 새로 지어진 주공아파트에 입주했다. 처음 살아보는 아파트, 처음 가져보는 우리 ‘집’이었다. 문을 열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 세간살이를 볼 수 없고, 우리 가족만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는 온전한 우리 ‘집’이었다. 15평 정도의 공간에 거실 겸 방이 하나, 안방 하나, 작은 방 하나, 싱크대 하나로 꽉 차는 부엌이 전부였다. 현관문 옆에 있던 내 방 역시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책장 하나로 꽉 찼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불평은 없었다. 몇 년 단위이긴 했지만 조금씩 넓어지는 우리 집을 보며 가난이 서서히 비껴가고 있구나 느꼈다. 이후 96년도에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계시는 20평 아파트가 부모님이 일군, 방과 집의 마지막 종착지다. 


  궁핍하다면 궁핍했고, 궁상이라면 궁상이었던 유년기와 청소년기였다. 원하던 것을 얻지도 못했고 얻자고 작정하기도 죄송했던 평균소득 이하의 생활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집은 왜 이 정도로 밖에 못 살까 비참함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때마다의 공간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부모님의 최선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만고만하게 가난했던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기만 다를 뿐 우뚝하게 여유롭지 않았던 삶들이었다. 갑질 하는 주인집이 없던 골목, 주인집 딸내미 내 친구에게 큰소리쳐도 하나도 구박받지 않던 골목이었다. 


  3학년이었을까 4학년이었을까, 어느 날 하교 후 나는 심통이 나 있었다. 친구가 피아노 자랑을 했을까, 자기 방 자랑을 했을까,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에 서러움이 차올라 우리 집에는 뭐가 이렇게 없냐고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울음 반 짜증 반 섞인 목소리로 콧구멍에 잔뜩 힘을 주고 씩씩댔다. 잠시 후 바로 옆 건어물 가게 아줌마가 와서 갑자기 방문을 열고, “아이고 이 집에는 편물기계도 있고, 쌀도 많고, 책상도 있고, 없는 게 없네. 니는 좋겠네.” 하시는 거다. 그 장면이 색종이에서 방금 오려낸 어떤 모양처럼 선명하고 반듯하게 눈앞에 놓인다. 아마 엄마가 부탁을 했겠지, 우리 집에 뭐가 많다고 부럽다고 좀 해 주이소라고. 냉큼 달려와 옆집 꼬맹이의 꼬인 마음을 풀어주던,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곁에 살던 내 방과 내 집이 그렇게 나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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