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비엥
루앙파라방에서 방비엥가는 기차를 전날 예매했었는데 막상 아침에 가려고 보니 발권이 되지 않았다. 12go에 환불을 요청하고 숙소에 티켓팅을 부탁했다. 원래 타려던 12시 기차는 이미 매진되어서 하는 수 없이 3시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3시 기차인데도 만석이었다. 좌석을 찾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던 객차가 안정이 되면서 주위가 보였다. 미국계 대학생 몇 명을 빼고는 거의가 현지인이었다. 루앙파라방에는 태국과 베트남 사람들이 많아서 라오스 사람들이라고 특정할 만한 요소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한데 모여있으니 이들만의 특징이 보였다. 특히 남자들은 목이 짧고 굵으며 어깨가 두꺼웠다.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 tv에서 본 몽골인들과 닮았다.
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밖의 풍경이 경이로웠다. 철로는 이미 높은 고도에 놓여 있었는데 산들은 그보다 더 높이 솟아 있었다. 거울처럼 맑은 하늘과 높은 산들의 층위를 구름이 적절하게 메워 주고 있었다. 기차는 우거진 밀림과 짙고 푸르른 산들의 사이를 매끈하게 지나갔다. 산들의 사파리를 기차로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기대하는 것은 기차여행의 묘미였다.
고생은 했지만 나름대로 문제를 잘 해결한 며칠의 여행이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다. 방비엥역과 숙소의 거리를 미리 알아보지 않았고 이동 수단도 고려해 보지 않았다. 기껏 숙소에 메일을 보내 이동 수단을 문의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조차 답장을 확인하지 않았다. 방비엥역에 내렸을 때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평지였던 루앙파라방과는 공기의 질이 달랐다. 여긴 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청량감이 들었다. 막상 역에서 나오니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차를 골라 타고 떠나갔다. 택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로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은 낮이기도 하거니와 역은 유동 인구가 많아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는 것을 루앙파라방에서 학습했기 때문이다.
미국계 대학생들이 타고 있는 툭툭이 기사에게 휴대폰으로 숙소를 보여주고 흔쾌히 탑승 허락을 맡았다. 기사는 툭툭이의 긴 나무 의자가 아닌 자신의 조수석에 앉는 특혜를 베풀었다. 하지만 에어컨이 되지 않는 차의 좌석은 특혜가 아니었다. 차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열과 유리를 통과한 태양열이 온몸을 달구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다가 방비엥 근처에 도착해서는 흙먼지가 들어왔다. 사막의 모래 폭풍 같은 흙먼지는 숨을 못 쉴 정도로 얼굴을 덮쳐왔고 눈까지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안개가 깔리듯 흙먼지가 깔려서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의 풍경들이 그나마 더 잘 보였다. 멀리 신비스럽게 생긴 산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웅장하고 장엄했다. 이 산이 방비엥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를 막고 눈을 감아가며 방비엥에 도착했다. 방비엥은 황무지에 세워진 도시 같았다. 포장이 덜 된 길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들, 양철지붕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작은 마을을 닮아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오토바이들, 자동차의 경적이 거리를 분주하게 만들었다. 묘한 들뜸이 번져있는 낯선 거리에 툭툭은 멈췄고 나는 흙먼지를 지그시 누르며 발을 내디뎠다.
대로에서 멀지 않은 숙소를 일부러 돌아서 늦게 도착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처음 가졌던 도시의 인상이 더 굳어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급하게 형성된 조잡함이 보였다.
숙소의 매니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1층이라서 시끄럽다며 업그레이드 해 준다고 했다. 같은 가격이면 나쁠 것도 없어서 동의하자 근처의 다른 건물로 안내했다. 아마 사장이 같은 숙소인데 손님들이 많이 없어서 한곳으로 모으는 듯했다. 루앙파라방의 숙소도 베트남 사람이 관리를 했었고 여기도 베트남 사람이 관리를 했다. 나는 짐을 방에 던져놓고 바로 내려와 오토바이를 렌트했다. 기름을 넣으려 가는데 굳이 네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왔던 길이 방비엥의 중심이었다. 대로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 더운 바람이 아니다. 하늘도 그늘지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의 경험으로 봐서 비가 올 징조다. 한국에서는 소나기라고 하는 이 현상을 라오스는 뭐라고 부르는지 몰라도 아무튼 비가 올 것이다. 기름만 넣고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벌써 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바람이 세게 불어서 캐노피를 접었다.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금세 굵은 비가 내렸다. 나는 창틀이 없어 반쯤 오픈이 된 숙소의 1층에 앉아서 비를 구경했다. 멀지 않은 하늘에서 천둥과 함께 선명하면서 뻐득한 굵은 선이 길게 허공에 그어졌다. 마치 백열등의 필라멘트를 길게 펴 놓은 것 같았다. 합판과 양철지붕과 천막이 각기 다른 소리로 긴장을 부추겼다. 이렇게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바닥에서 튕겨 오르는 빗방울들이 바람과 함께 살결에 닿았다.
비는 메말랐던 땅이 웅덩이가 되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조금 전까지 흙먼지가 날리던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씨의 변화는 급진적이었다. 비가 그치기를 바랄 필요는 없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낭만이 있는 것이다. 빗방울이 잦아들었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다. 방비엥은 큰 읍 정도의 도시였다. 단순하게 가운데 큰 도로가 있고 도로의 서쪽에 모든 시설들이 집중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골목이 아주 깊다거나 복잡하지도 않았다.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제법 넓은 강이 흘렀다. 그리고 도시가 있었다. 풍수의 배산임수를 모르더라도 이곳에 서게 되면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비가 와서 어둠이 빨리 찾아 들었다. 겨우 5시가 넘었을 뿐인데 가게들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방비엥 시내를 몇 번 돌고 나서 도로의 동쪽, 어둠이 짙은 곳으로 갔다.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냥 봐도 야시장인데 도로의 맞은편에도 노점들이 모이고 있었기에 어디가 진짜 야시장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건 공기총으로 진열 해놓은 음료수를 맞춰 떨어뜨리면 가져가는 사격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격장에 있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이었다. 5학년 정도 되었을까? 진한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에 수시로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본질은 숨길 수 없었다.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그 야무진 얼굴은 어려운 시험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나오는 아이들 고유의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어른들은 짧은 순간에 그런 집중을 하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날리듯 쉼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자기들 손바닥 만한 음료수가 수시로 떨어졌다. 나는 진열된 음료수처럼 아이들도 상품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가 이 아이들을 거리로 내몰았을까?
야시장을 나와서 제일 번화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사지를 받긴 이른 시간이라 돌아다니다가 환하게 불이 켜진 네일샵이 보였다. 손을 쭉 펴 보았다. 까맣게 떼도 끼었고 손톱도 제법 길었다. 자유여행을 하다 보면 먹고 자는 것 외에 신경을 잘 쓰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았던 손톱을 정리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밝은 내부에, 젊은 서양의 아가씨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에게서 네일을 받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사장 같았다. 그녀에게 손톱을 정리할 거라고 말했다. 잠시 뒤에 직원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아닌 아이가 나를 불렀다.
의자에 앉으며 아이가 방금까지 만지다가 내려놓은 휴대폰이 보였다.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애니팡같은 게임이 켜져 있었다. 아이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지문조차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움이었다. 아이의 손에 비해서 내 손톱은 너무 억셌다. 아이가 꼬물거리며 뭘 하는 것 같은데 손톱은 잘려 나가지 않았다. 손톱깎기를 누르면서 힘이 드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신경을 쓰는 아이에게서 갓난아기들에게나 들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끔 코를 훌적이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아이를 봤다.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조금 지저분했다. 아무리 봐도 14살인 내 딸보다 커 보이지 않았다. 몇 살인지 물었다. 아이는 베트남 출신이며 16살이라고 했다. 혹시나 학교에 다니는지 물었는데 역시나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이 질문이 아이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는지 나의 눈을 외면한다. 한국에 있는 내 딸은 수많은 기회와 지원이 주어져도 노력하지 않는다. 이 아이에게 한국의 아이들이 받는 혜택의 10%만 주어져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오지랖일지라도,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생업에 내몰리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손톱 정리만 하고 나오려니 미안했다. 그래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받았다. 발톱도 정리하고, 귀도 청소했으며 샴푸도 했다. 더 할 곳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4곳을 하고 내가 지불한 금액은 십구만 키프, 우리나라 돈으로 13,000원 정도였다. 그 돈에서 아이의 몫은 또 얼마나 될까? 그 아이의 애 쓰는 얼굴이 여행 내내 생각이 났다.
네일샵을 나와 숙소로 가는 길이 시끄럽다. 미국의 대학생들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맥주를 병 채로 마시고 있다. 소리 지르는 무리도 있고 윗옷을 벗고 몸을 과시하는 아이도 있다. 루앙파라방에서도 숙소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그냥 가버리는 걸 목격했었다. 여행 온 나라에 대한 존중이 없고 현지인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젊음의 패기, 무모, 열정으로 봐 줬을텐데 지금 미국과 트럼프가 우리나라에게 가하는 관세 압박을 보면서(당시에는 관세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음) 이 아이들에게도 패권국가의 오만함과 무례함이 보였다. ‘우리나라가(미국) 강대국인데 마음대로 해도 돼. 약소국이 미국민을 상대로 뭘 어쩌겠어’ 이런 표정과 몸짓이었다. 머리가 노란 앵글로 섹슨계 남자아이들을 보면 모두가 트럼프 같았다.
방비엥을 보면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할 때와 다르지 않다. 그때는 총이라는 무력을 내세워 금과 가죽을 수탈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은 달러라는 경제력을 내세워 천혜의 자연환경을 탐닉하기 위해 온 것이다. 중국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국이 서부에 건설한 대륙횡단열차같은 고속철도를 건설했다. 이렇게 달러가 휩쓸고 지나가면 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는 사라진다. 전통적인 것은 돈이 되지 않는 이유로 사양 되고 오로지 달러로 환원되는 것들만 살아남는다. 야시장에서 본 여자아이들의 몸뚱아리와 네일샵에서 일하는 아이의 노동력처럼.
다음 날, 일어나서 숙소를 하루 더 연장했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블루라군1 로 갔다. 유명세에 비해 실제 물속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양의 젊은 커플이 그네를 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유튜브에서처럼 나무에 올라가 몇 번 뛰어내렸다. 나중에 60대 초반의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와 나를 따라 뛰어내렸고 멀리서 술을 먹던 젊은 한국 청년이 멋지게 다이빙을 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옷을 차려입고 블루라군1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묵직하게 굵은 비가 내리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는 느낌이었다. 운동화를 벗고 가다가 헬멧까지 벗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이때 아니면 감기 걱정, 환경 오염 걱정 하지 않고 마음껏 비를 맞을 수 있을까?
맨발로 운전하는 나를 현지인들까지 가엾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숙소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태국으로 가는 날 이었다. 혼자 비엔티안으로 가서 버스를 타려고 했었는데 숙소에서 우돈타니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 시간과 고생을 덜 수 있었다. 12go와 마찬가지로 복합 운송 수단이었으며 숙소에서 적어준 영수증이 티켓의 역할을 했다.
9시에 숙소로 툭툭이 픽업을 왔다. 툭툭에는 이미 다섯 명의 미국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키가 컸고 마른 체형에 머리카락을 뒤로 묶었다. 같은 백인이라도 피부와 머리카락의 색은 미세하게 차이가 났다. 모두 비슷한 복장과 배낭으로 봐서 일행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툭툭에 올라타는 나를 보며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수줍어하지 않으면서 나서지도 않는 그 중간쯤 되는 차분함이 있었다. 서로 밝은 얼굴로 짧게 이야기하며 조용히 웃기도 했다. 방비엥의 외곽을 돌면서 여학생 몇 명이 더 탔는데 하나같이 그렇다. 한국의 여성들, 하지만 요즘에는 서구화되어 잘 쓰지 않는 ‘단아하다’라는 표현이 이 아이들에게 딱 맞았다. 한국이 아닌 서양의 아이들에게 한국적인 멋을 느꼈다. 짧은 시간 동안, 이 아이들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내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졌던 선입견을 이 아이들이 부셔주었다. 어느 지역, 어느 나라를 가도 예의 없고 무례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종과 국가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이었다. 이렇게 밝은 아이들과 우돈타니까지 같이 가게 되어서 행복했다. 툭툭은 대기하는 버스에 도착했고 내가 제일 먼저 내려 아이들의 배낭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은 내리면서 Thank you“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