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가을과 멈춰버린 시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by 윤호근

일곱 살의 가을이었다. 세상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던 그 계절 들판의 잔디는 햇살을 받아 금물결처럼 일렁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런 황금빛 언덕에서 우리는 놀고 있었다.


나와 세 친구는 비닐포대를 가져와 썰매놀이에 한창이었다. 비닐포대에 앉아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황금빛 잔디들이 눈앞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몇 번이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웃어댔다.


"야, 우리 경주하자!"


친구 중 하나가 제안했다.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일렬로 서서 출발선을 만들었다. 각자 비닐포대를 깔고 앉아 준비 자세를 취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을까.


"하나, 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 썰매를 밀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밀었다고 해야 할까.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균형을 잃은 나는 썰매와 함께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황금빛 잔디들이 빙글빙글 돌며 시야를 가렸다. 하늘과 땅이 뒤섞이며 회전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누가 나를 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일어났고,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의 놀란 목소리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희미한 메아리처럼 사라져 버렸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나는 다리에는 무거운 깁스가 감겨 있었고,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아, 다 나을 거야."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그때는 '괜찮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다만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해 겨울과 봄을 병원과 집에서 보냈다. 다른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나는 아직 깁스를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벚꽃이 피고 질 때까지도 나는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은 입학이었다. 불편한 다리를 끌며 교실에 들어섰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아이들의 시선이 내 다리에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갔다. 선생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셨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달라졌다. 황금빛 가을 언덕에서의 그 한순간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친구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아니, 원망할 수도 없었다. 누가 밀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가을이 되면 그날을 생각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잔디밭과 바람 소리, 그리고 친구들과의 마지막 온전한 놀이 시간을. 그 순간이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때로는 만약 그날 경주를 하지 않았다면, 만약 누군가 나를 밀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만약'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불편하지만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그 황금빛 가을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다르게, 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