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말의 유효기간
나는 겨우 신의 도움을 받아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는 떠나기 전, 내 입술에 투명한 인장을 찍는 시늉을 했다.
"오늘부터 24시간 동안 당신이 내뱉는 모든 관용구는 '문자 그대로' 실현될 거야. 이게 지난번 합의를 어긴 것에 대한 과태료야. 조심해. 특히 한국인들이 잘 쓰는 그 말들을 절대 하지 마."
그가 사라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향했다. 최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TV를 켜자마자,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9회 말 투아웃에 역전 만루 홈런을 얻어맞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배꼽 빠지겠네! 진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순간, 내 상체가 기괴하게 흔들리더니 배꼽 부근에서 진짜로 무언가 툭 하고 빠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입이 접착제로 붙인 듯 쩍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내 배꼽은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말문이 막힌'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배꼽을 소중하게 주워 들고, 메모지에 필사적으로 적었다.
[미안합니다. 취소! 다 취소!! 제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입이 열리고 배꼽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창밖에서 신의 웃음소리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아, 진짜 살 것 같네."
그 말을 내뱉자마자 내 몸에서 갑자기 생기가 넘쳐흐르더니, 방 안의 화초들이 <잭과 콩나무>처럼 천장을 뚫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저주는 나쁜 말뿐만 아니라, 모든 '강조하는 말'에 반응한다는 것을.
나는 배꼽이 돌아온 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이 씨가 되는' 저주가 재앙이라면, 역발상을 하면 축복이 아닌가? 9급 신은 나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한국인의 '해학'과 '기회주의'를 과소평가했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샤워하고, 경기도 근처 외곽의 한적한 로또 판매점을 찾았다. 이곳에서 나는 내 인생을 바꿀 한마디를 내뱉을 준비를 마쳤다.
계산대 앞에 선 나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발음했다.
"아,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진짜 돈벼락이나 한번 시원하게 맞았으면 좋겠네."
순간, 편의점 내부의 기압이 급격히 변했다. 공기가 무거워지더니 천장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왔다! 금괴인가? 아니면 5만 원권 뭉치인가?'
물리 법칙을 무시하지 마세요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을 뚫고 무언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우아하게 흩날리는 지폐가 아니었다.
"깡! 깡! 콰과광!!"
그것은 10원짜리 구권 동전들이었다. 그것도 초속 100m의 속도로 낙하하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타격'을 동반한 금속의 폭풍이었다. "으악! 살려줘!" 돈벼락은 은유가 아니었다. 9급 신이 관리하는 '말실수 처리반'은 내 요청을 아주 성실하게,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접수했다. 나는 순식간에 수만 개의 동전 더미 아래 깔려 버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동전들은 축복이 아니라 살상 무기였다.
"돈방석"의 배신
나는 동전 더미를 헤치며 간신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나는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소리쳤다.
"이게 뭐야! 내 말은 이게 아니라고! 진짜 돈방석에 앉아서 편하게 살고 싶단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엉덩이 밑으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전 세계의 온갖 화폐를 눌러 붙여서 만든, 세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거친 '방석'이었다. 문제는 그 방석이 내 키보다 높게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나는 천장에 머리를 박은 채,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종이 뭉치 위에 옴짝달싹 못 하고 고립되었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내 말에 반응한 듯, 방석에서는 수면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깨달았다. '편하게'라는 말은 죽음이나 영원한 잠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이 보살이라더니"
의식을 잃기 직전, 익숙한 주황색 조끼를 입은 9급 신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번엔 아예 캠핑 의자를 가져와 팝콘을 먹으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대단하다. 돈벼락을 주문하는 놈은 내 공무원 생활 수천 년 동안 네가 처음이야. 다들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고 점잖게 빌지, 그렇게 '물리적인 기상 현상'으로 요청하진 않거든."
"우읍, 읍!(살려줘요!)"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돈방석과 동전들이 순식간에 모래처럼 변해 흩어졌다. 나는 바닥으로 추락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잘 들어, 필멸자. 너한테 붙은 이 저주는 '언어의 마법'이지. '은행 시스템'이 아니야. 네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달라고 하면, 진짜로 거대한 거위가 네 배를 가르고 나올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그럼 전 평생 부자가 못 되나요?"
신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네가 '입이 보살'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면 돼. 남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만 만 번쯤 하면, 그게 네 기운이 되어 돌아오거든. 근데 너처럼 날씨 불평으로 평생을 보낸 놈이 그게 가능하겠어?"
나는 그날 이후,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 사람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행복하세요!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꽃길만 걸으세요!"
그런데 여기서 소름 돋는 반전이 일어났다.
내가 어떤 아주머니에게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외치는 순간, 아주머니가 밟는 보도블록에서 진짜로 날카로운 장미 덩굴과 가시가 솟아올라 아주머니의 다리를 할퀴어버린 것이다. "이 미친놈이!" 아주머니의 가방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렇다. '꽃길'은 낭만적이지만, 실제로 걷기엔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길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함축적이라, 신들이 그것을 '문자 그대로' 처리하는 순간 모든 축복은 재앙이 된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꽃길만 걸으라"는 축복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장미 가시 함정이 되고, "대박 나세요"라고 외치자, 지인의 가게 천장에서 거대한 박이 떨어져 지붕을 뚫는 광경을 본 뒤였다. 나는 9급 기상 신을 호출했다.
"제발, 입 좀 닫게 해줘요. 아니면 이 저주를 고칠 방법을 알려주든가!"
신은 아주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내 앞에 나타났다. "거 봐, 언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이제 알겠어? 어쩔 수 없군.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가장 '말이 많은' 곳 지하에 있는 그곳으로 보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