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계약의 이면
우리는 결국 '기상 서비스 수준 합의서'에 서명했다. 한 달에 불평 세 번 제한, 기상 현상에 인격 부여 금지 등등. 나는 눅눅한 종이 위에 이름을 적었다.
"자," 9급 신이 사라지기 전 덧붙였다. "이제 휴전이야. 나도 당신의 '불평'을 더 이상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지 않겠어. 하지만 조심해. 내가 당신을 괴롭힌 게 아니거든."
"네? 그럼, 그 우산이랑 비둘기는요?"
신이 기괴하게 웃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말했다. "난 그저 당신의 '말'에 질서를 부여했을 뿐이야. 당신이 '날씨가 나를 노린다'라고 말하는 순간, 기상 시스템은 당신의 '믿음'에 반응하기 시작한 거라고. 그건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거였어."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비는 이제 평범하게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입을 열려다 멈췄다.
"아... 진짜 날씨가..."
순간, 하늘에서 작은 천둥소리가 들렸다. 마치 "해봐, 한 번 더 말해봐. 그럼, 진짜로 해줄게."라고 속삭이는 듯한 불길한 진동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집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이제 나는 날씨보다 내 입이 더 무서워졌다.
그 9급 기상 신과의 '합의서'에 서명한 이후, 나는 한동안 침묵 수행을 하는 수도승처럼 살았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물리적인 재앙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하지만 인간의 습관이란 것은 무서운 법이다. 특히 나처럼 맵고 짠 한국어에 길든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사건은 어느 지독하게 운이 없던 금요일 저녁, 강남역 11번 출구 근처에서 터졌다.
"땅이 꺼지라 한숨만 나오네"
그날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프로젝트는 엎어졌고, 부장님은 내 기획안을 파쇄기에 넣어도 시원찮을 쓰레기 취급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새로 산 구두 뒤축이 까졌다. 나는 지하철 인파에 떠밀려 나오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땅이 꺼지라 한숨만 나오네. 확 다 꺼져버려라."
그건 그냥 관용구였다. 한국인이라면 하루에 열 번도 더 쓰는, 영혼 없는 한탄이었다. 하지만 내 발바닥에 닿은 보도블록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린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진짜로 꺼지기 시작한 땅
처음에는 단순한 현기증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발아래 '강남대로'라고 적힌 보도블록이 정확히 내 한숨의 파동에 맞춰 5cm 정도 아래로 푹 꺼졌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오직 내가 딛는 발걸음마다 땅이 늪처럼 쑥쑥 들어갔다.
"어? 어어?"
내가 당황해서 멈춰 서자, 이번에는 내 주변 반경 1m의 지면이 마치 엘리베이터 내려가듯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무릎 높이, 허리 높이까지.
순식간에 나는 강남 한복판에 나만의 '개인용 싱크홀'에 갇힌 꼴이 되었다.
민원의 신과의 재회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행인들의 경악한 표정을 뒤로하고, 구덩이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9급 기상 신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복장이 좀 달랐다. 주황색 안전조끼를 입고 안전모를 쓴 채였다.
[ 지질 자원 관리국 — 지반 안정화팀: 파견직 ]
"아니, 이 양반아!" 그가 흙먼지를 털며 소리쳤다. "날씨 좀 조용해지나 싶더니 이제는 지질학 쪽으로 진출하신 거야? 내 업무 범위가 어디까지 넓어지는 줄 알아?"
"제,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한숨 한 번 쉰 거라고요!"
"당신 입이 문제라니까! 당신이 '땅이 꺼져라.'라고 했잖아. 우리 부서 슬로건이 '필멸자의 간절한 염원을 현실로'인 거 몰라? 상부에서 당신 한숨을 '지반 침하 요청'으로 공식 접수했다고!"
"죽겠다"라는 말의 무게
그는 투덜대며 무전기에 대고 "강남역 11번 출구, 개인적 감정에 의한 국지적 싱크홀 발생. 보수 작업 바랍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경고했다.
"똑바로 들어. 당신 아까부터 자꾸 '배고파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라고 중얼거리던데. 그 말 한 번만 더 해봐. 우리 옆 부서가 '저승사자 가용팀'인 건 알아? 걔들은 우리보다 훨씬 성격 급해. '죽겠다' 소리 나오자마자 바로 서류 가방 들고 출동한다고."
나는 소름이 돋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무서워 죽겠네"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