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보다 깊은 기억

#033

by 이로

엄마는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의 파동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말기 암 판정받고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을 때도, 엄마는 병원 침대 대신 정원의 흙 위를 택했다.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수제 허브차를 우려내며 엄마는 늘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비유들을 쏟아냈다.

"서윤아, 기억의 까마귀들은 온 우주를 비행하는 존재지, 좁은 탑 안에 둥지를 트는 애들이 아니란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네 인생이라는 우주를 멈추지는 마."

우리 집안에서 그런 형이상학적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16년 동안 엄마의 잠자리 동화와 매일 아침의 확언을 견뎌온 덕분에 나는 어느덧 엄마만의 기묘한 언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통역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환경 보호단' 모임에 나간 것은 필사적인 도피였다. 집안을 가득 채운 소독약 냄새에서 벗어나, 나비가 날아다니고 계절이 바뀌는 진짜 세상의 속도에 발을 맞추고 싶었다. 그곳에서 만난 민준은 '새벽'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지나 가장 먼저 빛을 맞는 시간. 그는 내 방대한 나비 기록에 감명받은 듯했고, 그 다정한 관심은 내게 가장 큰 위로이자 죄책감이었다.


나: 시간 여행을 간다면 가고 싶은 장소 베스트 5. 너는 어디야?

새벽: (한참 동안 입력 중...)

나: (네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기다린다.)

새벽: 질문이 좀 있는데,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고?

나: (...)

새벽: 1위는 지금, 이 선택. '환경 보호단'에 가입하기 전으로는 절대 안 가기.

나: (메시지에 하트를 누른다.) 석탄기에는 나도 너랑 같이 갈게.


그때 엄마가 머그잔을 들고 방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폰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치즈!" 엄마는 내 웃음소리가 마법 같아서 홀린 듯 따라왔다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엄마라는 위태로운 밤과 민준이라는 설레는 새벽은 내 머릿속에서 결코 섞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거금 30만 원을 들여 고성능 홈 캠 5대를 설치했다. 엄마를 기억하기 위한 ‘전지전능한 눈’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엄마의 상태는 나빠졌고, 어느 날 엄마는 모든 카메라의 전원을 꺼버렸다.

"기록하지 않으면 난 다 잊어버릴 텐데!" 내가 소리치자, 엄마가 붉어진 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다 가질 필요는 없어. 더 좋은 것들을 위한 재료는 이미 이 안에 다 있단다."


엄마가 떠나고, 집안에는 향냄새가 가득했다. 민준은 거실에서 뒷정리를 도우며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엄마의 마지막 말을 들려주었다. "엄마가 그러시더라.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

“서윤아,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해? 제왕나비의 ‘슈퍼 세대’ 이야기 말이야.”

민준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나비들은 자기가 가보지도 못한 길을 오직 본능과 기억만으로 찾아간대. 길을 잃어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그들 안에 이미 지도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엄마가 꺼버렸던 카메라들을 떠올렸다. 나는 노트북을 열어 외장 하드를 연결했다. 엄마가 전원을 끄기 직전, 마지막으로 기록된 영상이 궁금했다. 혹시 엄마가 남긴 원망이나 고통의 흔적이 있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마지막 영상 파일이 열렸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내가 예상했던 어둠이나 고통스러운 모습이 없었다. 엄마는 카메라 렌즈를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며, 마치 내 뺨을 만지듯 손을 뻗고 있었다.

“서윤아, 엄마가 카메라를 끈 진짜 이유를 이제야 말해주는구나.”

화면 속 엄마의 목소리는 비록 갈라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기록은 참 잔인하단다. 내가, 이 렌즈를 보고 웃을 때마다, 너는 미래의 어느 날 이 영상을 보며 ‘이때 엄마가 얼마나 아팠을까’를 먼저 떠올리겠지. 카메라는 내 미소 뒤에 숨은 통증까지 저장해버리니까. 나는 네가 나를 ‘기록’으로 기억하지 않길 바랐어.”


엄마는 카메라 전원을 내리기 전, 거실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서윤아, 까마귀들이 탑에 둥지를 틀지 않는 이유는 더 넓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란다. 카메라를 끄고 나니 드디어 네 얼굴이 똑바로 보이더구나. 렌즈 너머의 피사체가 아니라, 내 사랑하는 딸로 말이야. 이제 이 기계들을 치우고, 네 마음속에 있는 진짜 나를 꺼내어 보렴. 거기엔 아픈 엄마도, 깜빡이는 빨간 불빛도 없을 거야.”


영상이 끊기고 화면은 검게 변했다. 나는 그제야 엄마가 왜 그토록 단호하게 전원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붙잡아두던 ‘기록의 감옥’을 부수고, 내가 진짜 기억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민준이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창밖으로는 엄마의 정원에서 시작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새벽아.” 내가 그의 닉네임을 불렀다. “나 이제 알 것 같아. 엄마가 말한 별들의 땅이 어디인지.”

나는 눈을 감았다. 카메라의 화질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었던 엄마의 따스한 체온, 허브차의 향기, 그리고 나를 부르던 다정한 음성이 내 안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것은 픽셀로 이루어진 조각이 아니라, 내 온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살아있는 이야기였다.


“기억은 카메라가 아니라, 우리가 매번 다시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래.”

나는 민준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가 내준 숙제는 이제 끝났다. 나는 이제 나비처럼, 엄마가 내 안에 그려준 지도를 따라 나만의 긴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밤이 지나고 있었다. 창밖에는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별들이 지고, 민준의 이름처럼 고요하고 눈부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엄마의 정원은 이제 큰엄마와 나의 손길로 다시금 생기를 되찾았다. 엄마가 심어놓았던 라벤더와 로즈메리는 작년보다 훨씬 더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정원 구석구석을 채웠다.

민준은 여전히 주말마다 우리 집을 찾는다. 그는 이제 나비 전문가가 다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카메라로 정원을 감시하지 않는다. 대신 나란히 평상에 앉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나비들의 날갯짓을 그저 눈으로 좇을 뿐이다.


평상 위, 우리 사이에는 한 뼘 정도의 빈틈이 있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은 정적보다 훨씬 더 많은 말로 채워져 있다. 민준의 운동화 끝이 아주 미세하게 내 쪽을 향해 기울어질 때나, 그가 나비의 궤적을 설명하며 손을 뻗었다가 내 어깨 끝에 닿기 직전 멈칫할 때면, 그 찰나의 공기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긴장이 파르르 떨린다.

"서윤아, 저기 봐. 제왕나비야."

민준이 가리킨 곳에는 날개 끝에 검은 테두리가 선명한 주황빛 나비 한 마리가 백일홍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비들은 참 이상해. 아주 멀리 비행하면서도, 결국 자기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꽃을 정확히 찾아내거든. 아무리 넓은 들판이라도 그 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야."

민준은 나비를 보며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덧 백일홍이 아닌 내 옆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이 닿는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라는 말의 무게를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단어는 너무 무거워 자칫하면 우리가 정성껏 가꾼 이 고요한 평화를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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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우리는 함께 나비를 보고, 함께 별을 기다린다. 그것은 꽃이 만개하기 전, 가장 단단하고 소중하게 닫혀 있는 봉오리 같은 마음이었다.

"민준아, 엄마가 왜 '기억의 까마귀'라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나는 무릎 위에 떨어진 작은 잎사귀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까마귀는 영리해서 자기가 숨겨둔 먹이를 절대 잊지 않는대. 하지만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지. 계속 날아다니다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그곳을 찾아가거든. 내 안의 엄마도 그런 것 같아. 그리고…."나는 말을 아끼며 민준을 슬쩍 바라보았다. 민준의 눈동자 속에는 지는 노을과 함께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지금, 이 순간처럼 아주 가까이 곁에 있어도 보고 싶어지는 법인가 봐."

민준은 내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평상 위에 놓인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아주 살짝 겹쳤다. 잡는 것도, 그렇다고 놓는 것도 아닌 그 절묘한 온기.


나비가 다시 날아올랐다.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을 앞둔 나비의 날갯짓이 당당했다. 나는 더 이상 홀로 남겨진 아이가 아니었다. 곁에서 숨 쉬는 이 따뜻한 온기와, 내 머리 위 어딘가를 날고 있을 엄마의 기억이 있다면, 어떤 긴 겨울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별들이 하나둘 깨어나며 하늘이라는 검은 캔버스 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민준의 손등 위에 살며시 내 손가락을 얹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눈부신 새벽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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