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김 대리는 우리 회사 '오피스 빌런'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회의 시간마다 늘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발표 중에는 노트북으로 딴짓하거나 심드렁하게 커피만 홀짝였다. 누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했고, 종종 퉁명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건 물론이고, 회식은 늘 불참이었다. 그야말로 '철벽'이었다.
대부분의 팀원은 김 대리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원래 저런 사람'이라며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편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속으로는 '대체 저런 태도로 어떻게 회사에 다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김 대리와 둘이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서먹한 공기 속에서 KTX를 탔다. 나는 노트북으로 업무 자료를 정리했고, 김 대리는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래처 미팅 내내 김 대리는 최소한의 말만 했고, 그마저도 무뚝뚝했다. 미팅이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영혼 없이 젓가락만 움직였다.
그날 밤, 나는 출장 온 김에 근처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걷는데, 저 멀리 방파제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김 대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김 대리는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응, 엄마. 나 잘 도착했어."
의외로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회사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어조였다.
"밥은 먹었지? 응, 불고기 정식. 맛있었어. 회사 사람들도 나 잘 챙겨줘."
그의 거짓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회사 사람들이 잘 챙겨준다'라니. 김 대리는 몇 번 더 다정하게 엄마와 통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 순간, 그의 표정이 확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무표정하고 피곤함에 절어 있던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짧고도 따뜻한 미소를.
다음 날, 회사로 돌아오는 KTX 안. 나는 용기를 내어 김 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김 대리님, 어제 바닷가에 계셨죠? 저도 산책 나갔었는데, 못 본 척 지나쳤어요. 혹시 가족이랑 통화하는 것 같아서요."
김 대리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엄마랑 통화했어요. 요즘 엄마가 많이 편찮으셔서… 걱정하실까 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다 좋게 말해요."
그의 눈빛에는 피로와 함께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김 대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푸른 바다가 담긴 사진이 있었다.
"어제 바닷가에서 찍은 거예요. 엄마한테 보내드렸어요. 보고 싶어 하셔서."
나는 사진 속 바다를 보았다. 평범한 바다였지만, 김 대리의 따뜻한 마음에 특별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빌런' 같은 모습 뒤에 숨겨진 진심이 내게 닿는 순간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김 대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회의 시간의 무표정도, 퇴근 시간의 칼 같은 움직임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치는 그는 더 이상 빌런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저녁, 병실에 누워 아들의 목소리만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장인'을 연기하러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보였다.
우리는 가끔 눈이 마주치면 아주 짧게 목을 까딱이며 인사했다. 동료들은 내가 왜 김 대리에게 부쩍 친절하게 구는지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 김 대리가 웬일로 내 자리로 다가왔다.
"저…. 오늘 퇴근하고 시간 좀 괜찮으세요?"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꽂혔다. '철벽' 김 대리가 먼저 제안하다니.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화려한 술집도, 근사한 식당도 아닌 병원 근처의 낡은 빵집이었다. 그는 거기서 단팥빵 한 봉지를 샀다.
"엄마가 여기 단팥빵을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우리는 병원 5층, 501호실 앞에 섰다. 김 대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 그 '나긋나긋한 아들'의 표정으로 가면을 바꿔 썼다.
"엄마, 나왔어! 오늘은 회사에서 제일 친한 동료랑 같이 왔어."
침대 위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눈을 뜨지 못하셨다. 기력 없이 누워 계신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김 대리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였다. 부장이 나를 칭찬했다는 둥, 보너스를 받았다는 둥. 나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그의 연기를 도왔다.
한참을 떠들던 김 대리가 잠시 물을 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침묵이 흐르는 병실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감긴 어머니의 눈가에서 눈물 한줄기가 가만히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우리 아들 친구분."
나는 깜짝 놀라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우리 아들, 회사에서 많이 힘들죠? 성격도 무뚝뚝하고 숫기도 없어서 미움받을까 봐. 제가 아픈 것보다 그게 더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저녁 전화할 때마다 회사 생활 너무 즐겁다고 거짓말하는 거. 사실 다 알고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마른 입술로 옅은 미소를 지으셨다.
"아들이 나를 위해 연기하는 동안, 나도 아들을 위해 모르는 척 속아주고 있었거든요. 그래야 아들이 덜 미안해할 테니까요. 우리 아들, 사실은 참 따뜻한 아이예요."
물을 떠 오던 김 대리가 문가에서 멈춰 섰다. 그의 손에 든 컵 속의 물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의 거짓말을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보였지만, 곧이어 안도감이 섞인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김 대리는 회사에서 더 이상 빌런이라 불리지 않는다. 여전히 말수는 적지만, 가끔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면 그는 동료들에게 먼저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곤 한다.
서로의 거짓말을 알고도 기꺼이 속아주던 그 눈물겨운 사랑이, 차갑던 김 대리의 세상을 조금씩 녹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